'앤코이가 말합니다'에는 21세기 개인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에 대한 높은 통찰력과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2022-08-17 17:33
424
안녕하세요. 국제학과 1학년에 재학중인 ㅇㅇㅇ입니다. 저는 질문지에서 3번을 택하겠습니다. ^^
③"단순한 법 제도와 단순한 관료제의 규칙들을 가지는 것이 동등한 특권과 국민들을 위한 최선의 이익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막대한 비용이 드는 법 제도의 조건과 복잡성을 유지함으로써 이것이 하나의 면제권과 특혜로 오용되는 형태"
제 꿈은 변호사입니다. 평소 다양한 법 교양을 찾아 듣고, 관련 독서를 하며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법 교양을 들으며 알게 된 선배에게 무심코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선배는 왜 변호사가 되고 싶은 거에요?’ 그때 선배의 대답이 꽤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집안에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거든. 나라도 법을 공부해야지 우리 가족들 손해 볼 일 없지 않겠어?’
그럴 듯하게 느껴져 ‘끄덕끄덕’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조금 맘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가족 중에 공대생이 없다고 해서 누군가가 꼭 공대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대생이 없다고 해서 의대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문대, 사회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선배는 집안에 법 공부한 사람이 없으면 왜 손해를 볼 위험이 커진다고 말했을까요?
왜 저는 순간적으로 그 말에 납득했던 것일까요?
이 분야에 대해 좀 더 지식이 쌓이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읽게 된 법조문은 제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단순히 법전의 분량이 방대하고 판례가 많다는 이유만이 아닙니다. ‘해방공탁’,‘서증인부’,‘공시송달’과 같은 처음 들어보는 아리송한 단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난해하고 까다롭게 느껴졌던 것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단어의 뜻과 발음은 같지만 그 뜻이 다른 법률 용어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위기’는 일상 생활에서는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말하는 단어이지만, 법률 용어로는 ‘어떤 물건의 소유자가 그 물건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 시킬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상대방의 의사 표시’를 말합니다.
‘유기’라는 말은 일상 생활에서는 ‘내다 버리다’라는 뜻이지만 민법에서는 ‘어떤 사람을 보호받는 상태로부터 그 보호를 거부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에 두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법령 용어의 의미가 다른 이유가, 그렇게 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일까요?
법령 용어를 좀 더 쉽고 일상과 맞닿게 설계할 수는 없었을까요?
이는 법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종종 내뱉곤 하는 불평불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들은 자연스럽게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의 넋두리’로만 치부되곤 합니다.
심지어 학생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아리송한 단어들을 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김두식 변호사는 ‘헌법의 풍경’ 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법률 용어가 이다지도 어렵게 설계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지식인’,‘기득권’으로서의 자신의 파이를 지키기 위해 일반인들의 접근을 차단한 법조인들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만약 김두식 변호사의 이러한 가설이 사실이라면, 한가지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아마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을지도 모르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일화입니다.
‘세종어제훈민정음’ 에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한 줄의 글로 적혀 있습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한다. 내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든다.’
이처럼 좋은 의도로 창제된 한글이지만, 당시에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한글의 반포를 반대하며 ‘갑자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다양한 핑계를 내세웠지만, 사실 그 주된 이유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언문을 깨우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동안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양반과 평민 사이를 가르는 핵심 권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종대왕의 공으로 한글은 성공적으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양반이 옳다 하면 ‘그렇구나’ 할 수 밖에 없었던 힘없는 백성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홍길동전’ 등의 한글 소설을 널리 향유하면서 양반들을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대부들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표방하고 있는 공화국입니다.
헌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평등한 지위를 가집니다.
그러나, 법이라는 분야에 있어 그 권력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소수의 법조계 사람들만이 법조문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리고, 일정한 급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아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계급이 생기게 되고, 이를 악용하여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이건 법에 명시되어 있다’ 라는 식의 사기입니다.
잘 모를 경우 속절없이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일가친척 중 법을 공부한 사람이 없었던 선배는 법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신분제도가 뿌리깊게 박혀있었던 조선 시대라면 모를까, 특정 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지식의 존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부적절해 보입니다.
명백하게, 법조계에도 ‘세종대왕’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힘들게 법률 용어를 암기해서 얻게 된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법조인은 없을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신분이었던 왕조차도 숱한 반대에 부딪혔던 일입니다.
감히 ‘제가 바꾸겠습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 정도 그릇이 된다고 오만 떨 생각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법조인이 된다면, 이러한 불합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법조인이 되고 싶습니다.
학벌이나, 직업적 권력을 가지고 으스대지 않고,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특권을 부끄러워하는 법조인이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Q. 만약 삶에 소명이란 것이 있다면?
A.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장래희망’을 가지도록 교육 받아왔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 대한 기성 세대의 평가는 냉혹합니다.
단지 진로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단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그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것은 기존 세대에서 전반적으로 옳다고 규정해놓은 행동방식이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매우 이른 시기부터 선행학습을 시작하고, 의대 진학을 위해 학창시절 전부를 투자합니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아직 목표를 정하지 못한 학생들은 불안에 떨곤 합니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인터넷을 조금 찾아보고 마음에 드는 직업을 ‘장래희망’으로 명목 상 설정해 진로희망 칸에 적습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한 학급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이미 달리기를 시작해서 저만치 앞장서 있고, 나머지는 뒤처졌단 생각에 일단 아무 길이나 정해서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양측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어린 나이부터 한 길을 목표삼아 달려온 학생들은,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쫓아온 목표가 좌절되었을 때 느끼는 절망은 엄청납니다.
내 삶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 느낌을 받으며,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됩니다.
아무 길이나 일단 선택하고 본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길이 나와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너무 멀리 와 있는 것입니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생판 모르는 길을 가보자고 결심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경우로 극심한 우울을 겪고 있는 학생들을 꽤 많이 보았습니다.
영화, 드라마, 자서전에서는 ‘단 한가지 삶의 이유’를 갖고 노력하여 성취를 거두는 인간 군상이 바람직하게 그려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간과하는 것은, 드라마틱한 경험 없이 ‘단 한가지 삶의 이유’가 생길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또한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이게 내 단 하나의 삶의 소명이야’ 결정짓는다 하더라도, 주위를 둘러보면 조금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 둘일 수도 있습니다. ‘난 이미 이걸로 정했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내가 가진 제 2의 재능을 놓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저도 고등학생 때까지는 종종 제 삶에 이유를 붙여보고자 했습니다.
‘나는 외교관이 될 거야, 이건 틀림없이 나의 길이야.’ ‘나는 친구들과의 우정이 제일 중요해.’ 와 같은 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스스로 붙인 삶의 이유가 좌절될 때마다 저는 너무나 큰 우울을 겪었습니다.
오로지 외교관이 되기 위해 살았던 제 앞에, 나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자존감이 낮아져 날카로워지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의 우정이 존재 이유라고 단언지었던 저에게, 혹시 친구와 싸우기라도 하는 날이 오면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존재 이유를 ‘이거다’ 라고 단정짓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제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하고 싶은 일이나 아끼는 것들이 분명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중한 것이며 존재의 이유는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언제나 눈을 돌리면 새롭게 소중한 것들이 있을 것이고, 하나의 목표가 좌절되더라도 날카로워질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새로이 시도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장 좋아하는 것이 생긴다면 열성을 다해 도전하고, 그 순간을 후회없게 보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습니다. 한 직업을 선택하면 평생을 그 능력으로 먹고 살았던 기성 세대와는 다르게,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시대는 100세 시대입니다.
평생 하나의 직업만 가지고 사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시대가 변한 만큼 교육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일찍 정해서 한 우물만 파’기를 강요하는 지금까지의 가치관은 이제 너무 낡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나’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희망하지만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고전 영미문학을 좋아하지만 일본 문학은 별로 좋아하지 않음. 그러나 언제 좋아하게 될지 모름.’
저는 저 스스로를 이렇게 열린 결말로 정의내리고 싶습니다.
Q.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가요?
A.‘변호사’라고 하면 흔하게 사람들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책상 한가득 자료를 쌓아놓고 밤낮없이 글을 읽고 처리하며, 재판에 나가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법 조항을 줄줄 읊습니다. 일을 다 끝내고 나면 해는 어둑해져 있고, 간신히 침대에 누워 눈만 붙이곤 하는 바쁜 변호사의 삶.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법조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싶습니다.
법을 공부하는 것의 장점을 나열해보라고 하면 많은 답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장점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각종 지식을 수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우물’만 파게 만드는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법조인은 세상 모든 사회 규약에 관여하는 ‘법’이란 이름의 지식을 탐구합니다. 자연과학, 인문학, 미술, 음악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관련법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법 공부의 최고의 장점입니다. 내가 흥미를 가진 모든 지식이 나의 무기가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실 저는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꽤 많은 편입니다. 취미로 영화 예고편을 만들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도 합니다. 그림도 꽤 잘 그립니다. 베이킹에 관심이 많고, 어렸을때부터 성당 반주를 맡은 탓에 밴드부에서는 키보드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께서는 제가 영상제작 동아리 부장으로 활동하는 것에, ‘입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꿈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만드는 변호사’, ‘시나리오 쓰는 변호사’, ‘음악하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관심 갖고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제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조금 재수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모든 것들을 함께 하면서도 공부도 꽤 잘 하는 편입니다.
대학교에 와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 모든 활동들이 훗날 법조인이 되었을 때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란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술,음악,영상편집 기술은 리트 시험 과목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전을 달달 외우는 변호사는 많아도, 영상 잘 만드는 변호사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는 ‘과시하지 않는 법조인’이 되고 싶습니다. 또한 제가 가진 지식과 능력을 저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밤새 쌓여있는 어려운 자료를 읽는 변호사’에 대한 지금의 환상도 좋지만, 저는 제가 만든 영상과 제가 쓴 글로 친근하고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조인이 되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초등학생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민법/형법 시리즈를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거나, 책으로 출간해보고 싶습니다. 또한, 가정형편,학벌 등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원한다면 법조인의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제 꿈이 ‘모두가 향유하는 법’ 시대의 도래에 작지만 확실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앤코이가 말합니다’ 게시판의 글을 처음부터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21세기 개인, 혹은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에 대해 높은 통찰력과 삶의 지혜로 분석해두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제가 감명깊게 읽은 부분은 ‘생존에서 공존으로(1)’ 게시글의 적자생존 개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 시원하게 지적해주신 것 같아서 반가웠습니다.
사실 오늘날에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굵직한 갈등이, 깊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적자생존’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일어나는 일 같습니다.
‘부자는 세금을 더 내야 하는가?’, ‘최저임금을 어느 정도로 보장해야 하는가?’ 등의 논제가 그러합니다. ‘적자생존’ 개념에 대해 찬성하는 측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가 잡아먹히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야. 따라서 돈이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해.’ 이러한 주장은 얼핏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때는 이 이론이 제국주의의 논리를 정당화하며 세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논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생존에서 공존으로(1)’ 게시글에서 인상깊게 읽은 한 문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사실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적응입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자, 짐승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도, 뾰족한 이빨도 없는 힘없는 개체인 인간이 지금처럼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제국주의에서 내세우는 적자생존의 논리처럼 ‘인간이 가장 강해서’가 아닙니다.
개체들 간의 소통이 불가한 짐승들과 달리, 인간들은 지혜를 모으고, 협동하고, 서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짐승들과 달리,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지금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들을 높이 대우해주고, 그렇지 않은 자를 내치는 사회라면, 그것이 짐승의 사회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요?
선진국일수록 사회 복지 수준과 약자에 대한 배려 인식이 높습니다.
이는 ‘도우면서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점점 지식인 계층에서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강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약해지고, 노인이 됩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 사회에서는 약해지는 순간 정적에게 잡아먹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목소리를 내어 지금 약한 사람을 도와준다면, 언젠가 우리가 약해졌을 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사회가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게시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적자생존’은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가 아닌, ‘적응하는 자’는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은 서로를 짓밟아 맨 꼭대기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인, 저소득층을 비롯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짐승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진정한 해결책일 것입니다.
저희 학교 1학년 필수교양 중에 ‘사랑의 실천’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그 과목에서 ‘감사일기 쓰기의 효능’을 배웠습니다. 직접 감사일기를 써볼 수 있게 양식을 제공하길래, 100일 동안 하루에 감사한 일 5개와, 선행 한가지를 적었습니다.
그 후 학기말에 감사일기 영상 공모전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감사일기를 쓰면서 얻은 마음가짐의 변화’를 주제로 영상을 만들어 제출했고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국제학부라는 과의 특성 상, 저희 학과에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유학파 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처음 입학했을 때는 그런 동기들에게 위축도 많이 되었고, 스스로를 비관하곤 했습니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많이 나는 거지?’
일상적인 영어 대화도 미숙한데, 정치/사회/법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도피성 반수를 시도하고 돌아왔으나 상황은 그대로였고, 자존감은 바닥을 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5개씩 감사한 일들을 적으며, 시야를 돌려 바라보면 제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공부란 것이 항상 재밌을 수는 없지만, 가난하고, 힘없고, 별 볼일 없는 어린 여자아이의 신분으로 훌륭한 학우들과 함께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학기를 시작하면서 두려움도 컸지만, 제가 다짐한 것은 ‘제일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제일 열심히 하자’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감사한 일을 찾으며 꾸준히 공부한 결과로 한국어로 진행되는 교양 수업의 경우 전부 A+를 받았고, 영어 전공 또한 뛰어난 동기들을 제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살면서 힘든 일을 겪게 되더라도, 멋지게 이겨낸 경험을 통해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막연히 머릿속을 떠다니던 생각들을, ‘앤코이가 말합니다’ 게시판의 글을 읽고 또 제 생각을 적어봄으로써 확실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써보려고 했지만 제가 아직 많이 배우지 못한 대학생이기 때문에, 적은 내용들에 어쩌면 편협하거나 생각이 짧은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둔 채 글을 제출합니다.
미흡한 구석이 있어도 너그러이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