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코이에게 전합니다

5기 선발자) 여러분이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연결성을 발견해 진정한 힘을 찾아내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장** 2024-09-03 07:46 조회수 아이콘 19

나는 그저 우리가 고통을 더 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에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 아픔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하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연결성을 발견해 진정한 힘을 찾아내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앤코이는 말합니다를 읽으면서 나는 에고와 순수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놀라웠던 점은 글에서 얘기하는 내용들이 의외로 나에게 낯설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나는 나에게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들은 숨겨진 나의 일부이되, 내가 원치 않는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되고자 하는 인재상과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내면의 미지의 힘에 의해 원하는 대로 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이전에도 내 안에 거대한 힘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표현이 다를 뿐 글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었다. 다만 분리된 자아의 개념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일상 속에서 굳어진 나의 에고들이며, 그것을 동일시하지 않고 죽게 뇌둘 수 있다는 말은 이전의 기억이 떠오르게 했다. 스스로 성찰하고 변화하려할 때 현신하는 미지의 힘은 사실 내면의 진정한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면의 나에게 집중하며 천천히 감정을 가라앉혔다. 호흡과 가슴 속 진동에 집중하니 잔재하던 분노는 사라지고 오직 나만이 홀로 남았다. 나를 방해하던 에고가 사라지니 보이지 않던 진실이 보였고, 나의 과오를 인정했다.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바라보며 나의 반응들을 점검하고 앞으로 개선해야 할 것들을 확인했다. 중도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뒤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느리게, 그러나 명확하게 나는 변화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나의 내면은 여전히 굳건히 실재함을 느꼈다. 이후에 회사에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더 이상 그 대화에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건설적인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분노하는 자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나의 내면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은 존재했지만 나의 대응 방법을 바꿀 수 있었다. 물 흐르듯 감정을 흘려보내고 의미 없는 동요를 줄일 수 있었다.


내가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내게 좋은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외부를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나 자신을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앤코이의 글을 통해 나는 나에게로 다가가면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무심코 추측을 한다. 그 사람의 일부분을 잠깐 보고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지를 단정짓고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보기도 하고, 내가 그랬듯 감정에 휩싸여 험담을 하기도 한다. 내게 있어 적절한 추측은 살아가면서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추측을 통해 상황을 예상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이 강한 통찰력과 직관이 되어 감각을 세워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에 사로잡혀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면의 힘으로 때에 맞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의 동일시를 통해 에고를 넘어 중용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외부의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며 밖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촉발된 자신의 감정이 해결의 열쇠임을 알고 자신을 향해 집중함으로서 흘려보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나아가야할 것이다.


최근 AI의 발전에 따른 4차 산업혁명에 접어들며 세계의 흐름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 AI들은 이미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공존하는 현실이 되었고, 오픈AI AI 기업의 관계자들이 내부고발로 AI 발전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통해 경각심을 알리기도 했다. 급격한 발전은 머지않았다. AI끼리의 연산으로 이들이 반복된다면 특이점을 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세상을 위해 그 흐름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웠다. 일개 대학생인 나는 아직 아는 것이 별로 없고, 그 흐름에 대처하기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안잡히기도 했다. 그러한 미래가 필연적으로 다가옴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연히 대비해야 한다고만 생각할 뿐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순간에 접하게 된 앤코이의 글은 나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나는 불안해하는 나의 자아를 잠재우고 내면에 집중하여 내가 해야할 것에 집중했다. 놀랍게도 차분하게 내면과 나를 연결할수록 아이디어가 샘솟는 경험을 했다. 나는 사고의 연결 뿐만 아니라, ‘내면과의 연결으로도 새로운 직관을 얻어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앤코이의 글을 읽을 때마다 연신 감탄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평소에 생각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명확히 정리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앤코이를 접한 이후로 나의 글을 써보고자 한다. 언젠가 글쓰기를 취미로 해보고자 하긴 했지만 이번을 계기로 그 필요성이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떠올려야 할까. 단순한 기술과 수동적인 태도보다는 아이디어, 날카로운 직관과 올바른 가치관, 철학과 사랑과 같은 영성적인 가치가 필요할 것이다. 나의 생각과 아이디어들을 타인과 공유한다면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내가 기존의 고전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것처럼, 그리고 앤코이의 글을 접할 수 있었던 것처럼 글의 힘으로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여전히 대비해야하고, 그 속에서 나의 강점으로 아이디어를 넘어, 가치들 사이의 연결을 이루어나갈 것이다. 미래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때에 파도처럼 밀려오기에, 나는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의 분별력을 높이고 나의 연결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처럼, 많은 이들이 다가오는 미래에서도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의식성장의 길을 이들과 함께 걸어가야겠다. 하나의 연결은 또 다른 연결을 낳고, 그것들은 이어져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앤코이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에 무심하라고 했다. 그것은 작게는 한 걸음 물러서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크게 보면 스스로 자유로워지라는 의미이다. 나는 앤코이의 글 덕에 다시 한 번 ''를 만나러 내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서일까, ''와의 대화에는 꽤나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최근에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었는데, 그 역시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비슷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정화작용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쁜 일상과 세간에 의해 마음이 썩어가고 있을 때, 내면의 ''는 종종 내게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어쩌면 앤코이 교육재단을 만나게 된 것도, 그러한 계기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앤코이의 글들을 읽어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앤코이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저 단순히 자신을 돌보라는 취지의 것이 아니다. 겉부분의 에고들을 넘어 내면에 더 깊이 다가가면, 그곳에 나를 온전히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아예 모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에고와 내면의 관점으로 접근하지는 못했기에 이것은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내 속에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에 나를 투영시켜 행동했다. 그렇게 의식을 통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의식을 따른다. 이것이 나의 신조라고 보아도 무방했을 것이다. 다만, 나는 특정 상황에 처하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들이나 성격들이 있었다. 내가 의식하고 행동하면 내가 되고자 하는 정체성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었지만, 대비되지 않았던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관계에 소극적으로 대하곤 했다. 대체 왜 그랬지 생각해봐도 그것은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당황시키곤 했었다. 특히 나에 대한 통제를 잃었던 시기는 더 심했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그것이 분리된 자아, 에고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에고임을 알고 그것들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하니, 내면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의 존재도 느낄 수 있었다. 행동하기 이전에, 외부에서 나를 내려다보듯 나를 관조하는 그것은 분명히 자신 그 자체였다. 안락함과 안온함에 빠져 있었을 때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벗어나지 못했던 스마트폰에게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빠져들기 이전에 애초에 나를 막아설 수 있었다

나는 앤코이가 말합니다를 읽으면서 적지않은 놀라운 경험들을 겪었다. 특히 내게 있어 가장 인상을 주었던 글은, ‘XVII) 트라우마(상처)에 잠재 되어 있는 변혁의 힘이었다고 단연하게 말할 수 있. 트라우마에 대한 내용들도 나에게 새로운 시각과 지적 영감을 주었지만 내게 영적인 영향을 준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더 깊은 내면과의 연결을 이루어낼 수 있게 했던 에너지의 원천은, 고타마 붓다의 이야기였다주변에서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가깝다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나는 고타마 붓다의 꺠달음과 가르침을 엿보면서 그것은 철학보다는 조금 더 다른 차원의 개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타마 붓다는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갈린다는 것을 언급했다. 자아성찰을 통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붓다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변화시키려 노력했으나 때로는 실패한 적도 많았다. 필연적으로 사회와 교류하며 살아가는 나는 고요히 내면에 주의를 두고 싶어도, 주변의 상황이나 인간관계, 과업 등 외부에 의해 주의가 흐트러질 때면 내 시간을 뺏기고 있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외부에 대한 나의 반응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그러한 변화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경험했던 것들이었다. 나는 나의 내면을 통해 변화를 추구할 때 나의 감정과 반응 역시 달라짐을 느꼈다. 급한 일이 생겨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나는 절망감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깨어 인식하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면의 동요 없이 다시 나의 일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붓다는 우리가 에고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정체감과 본성에 연결되면 깨어있는 의식에 충만해지고, 이 에너지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나는 글을 읽으면서 점점 내면에 몰입했고, 일시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나에게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관조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미지의 새로운 에너지가 나의 내면과 이어진 듯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나와 주변이 구분이 안갈  정도로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머릿 속이 맑아지며 주변의 모든 수많은 정보들이 나를 통과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것은 정말, 영적인 기운이 온몸을 지배하는 초월의 감각이었다. 우주에서 온 것 같은 에너지가 내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외부의 것들에 대해 나는 온전히 받아들이고 또 원하는 대로 반응할 수 있었다. 감을 찾기 어렵던 생명의 강이라는 표현이 차츰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에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나의 몸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때로는 에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내가 앤코이를 접하게 된건 단지 휴학생도 지원이 가능한 장학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고글을 읽어보면서 앤코이는 여타 장학재단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장학금 수여를 넘어 저 멀리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호기심이 생겼던 나는 Noble 내면의 소리함의 파일 양식을 열어 읽어보았고, 앤코이가 내게 던진 한 질문과 마주쳤을 때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주로 시간을 쏟는 분야는 어디입니까그대에게 설레임과 기쁨을 주고, 내적 동기를 얻는 일,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뒷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얼얼했다. 내게 있어 설렘과 기쁨을 느끼고, 나아갈 수 있게 하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가 마지막으로 가슴을 뛰는 감정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지?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당장 고민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충격만으로도 잃어버렸던 나의 감정들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현실에 찌들어 있던 나에게 놓고 있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뜨거웠던 심장을, 잃어버렸던 동심을 전해주었다. 미지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안락함 속에서 꽁꽁 숨어있던 나를 벌거벗기고, 스스로 직면하게 했다. 단 하나의 문장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이다. 나는 꽤나 스스로를 오래 봐왔기에, 나의 가치관과 성격, 적성과 재능, 장단점 같은 나의 특징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었지만 저 질문에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내가 가치를 두고 시간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그렇게 알 수 없었던 것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코이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새로운 동기를 얻었고, 새로운 관점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스승의 글을 통해 나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고 나와 마주하며 내면의 진정한 나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분리된 자아를 걷어내고 진정한 나를 느끼고, 붓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외부가 아닌 내면에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겪었던 감정과 경험들을 글로써 앤코이 교육재단에게 전달하고 있다. 대학교 시절, 짧은 글을 읽고 리뷰를 쓰는 과제를 매번 밤을 새가며 썼음에도, 오히려 힘이 샘솟는 경험을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가 스스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시간을 쏟는 것, 나에게 설레임과 기쁨을 주고, 내적 동기를 얻으며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일,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글을 쓰며 나에게 몰입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나아가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간단한 글쓰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고전을 읽으며 느꼈던 나의 생각을 기술하며 나의 세계를 확장해야겠다. 나의 내면을 적어내고 성찰하며 이원적 세계 너머 진정한 나를 향해 다가가야겠다. 그리고 의식성장을 이루며 나와 타인을 향한 글들을 써야겠다. 때로는 부드럽고 위로하는 글을, 때로는 엄하게 꾸짖는 글을 쓰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겠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들을 내게 선사해준 앤코이 교육재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앤코이는 내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고, 나를 이끌어주었다. 앤코이와 함께한 순간은 나에게 축복이었고, 가르침들은 앞으로 내가 이루어야할 새로운 과업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결심을 굳게 다지며, 앤코이 교육재단과 함께 세상을 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고자 한다.


세전메: 나는 그저 우리가 고통을 더 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 영상은 2026년 10월까지 게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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