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기 선발자) 사태의 본질인 ‘그 사건’ 자체를 보기 시작하게 되면서, 항상 공허했던 내면이 따스함과 자유로움, 내면의 힘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박**
2024-09-04 16:22
71
<나의 내면 아이에게 “나만은 너를 버리지 않을게” 말을 건네며 펑펑 울었다.>
나는 나를 태어나면 안 될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4살 때 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부모 없는 고아로서 자라왔다.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갔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슬프면서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복잡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이 감정들은 거짓된 자아인 ‘에고’를 키우면서 감정에 삼키어져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를 떠난 거야’라는 인지 오류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잘못된 인지 체계와 죄책감은 나 스스로를 향한 나의 태도를 비난과 공격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고, 실수를 했을 때 내 탓으로 여기며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했다. 나 스스로와의 관계에서의 소통 방식부터 이러했기에 타인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고, ‘죄인’이라는 깊게 뿌리박힌 신념은 타인과의 관계 맺는 것에 있어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앤코이가 말합니다’에서 트라우마에 대해 다룬 글을 읽고, 깊게 묵상하며 해리로 인해 멈춰버린 유아기 때의 나의 내면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내면 아이를 들여다보기를 멈추고 싶었고 실제 회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앤코이의 ‘가정폭력피해가정에 드리고픈 메시지’의 글은 나를 지지해 주며 내가 용기 있고 다세대 전수 되어 왔던 폭력을 끊어낼 수 있다는 응원과 더불어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고 싶지 않다’는 나의 순수 의식을 건드렸다.
용기를 내서 나의 내면 아이에게 “어떤 감정이 들어?”라는 질문으로 나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남’, ‘원망스러움’, ‘실망스러움’, ‘억울함’의 어머니에 대한 분노의 감정들이 먼저 올라왔다. “왜 이러한 감정이 느껴졌는지 말해줄 수 있어?”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고, 내면 깊은 곳에서 ‘사랑받고 싶었어’, ‘버림받고 싶지 않았어’, ‘혼자가 돼서 무섭고 두려웠어’라는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내면의 말을 들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고 이런 깊은 속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해준 내면 아이에게 고마움과 그동안 알아봐 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느끼며 “나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게”라고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멈출 줄 알았던 눈물이 더욱 쏟아지듯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실컷 울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 되돌아보니, 그 말이 정작 내가 부모님에게 그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고, 부모를 대신해 내가 심리적 엄마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주니, 고맙고 해소되는 느낌에 눈물이 났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해리로 인해 감춰졌던 위에 언급한 ‘정확히 알지 못했던 복잡한 감정들’이 어떤 감정들이었는지 명확하게 인지를 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다독여줌을 통해서 과거에 멈춰있던 내면 아이는, 당시 파편화된 영혼의 조각들이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심리적 채워짐을 느꼈는데, 이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신기하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감정의 고리가 풀리니, 처음 읽었을 때에는 심리적 거리가 멀게 느껴졌던 앤코이의 글이 가슴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가정폭력피해가정에 드리고픈 메시지’의 글 중 ‘부모의 잘못을 내 자식에게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부모를 각각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해하는데 있다’ 는 글과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모를 이상화 하느라 사태의 본질을 회피한다면 자아가 분열되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이로써, 어머니를 부모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태의 본질인 ‘그 사건’ 자체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생성되었을 영유아기 때의 암묵 기억 중 현재까지도 꿈에 나오고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는데, 어렸을 때 보았던 가정폭력의 장면이다. 지금 돌아보니,당시 나의 내면에는 ‘두려움’, ‘불안’, ‘무서움’의 감정들을 느꼈겠구나를 먼저 인식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머니 입장에서 또한 비춰보았을 때, ‘한 사람, 혹은 여성으로서 비슷한 감정들을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심리와 상처를 가진 한 인간으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건’ 자체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인지오류와 잘못된 신념을 바로잡게 되었다. 먼저 ‘나는 태어나면 안 될 죄인이다’라는 인지오류로 인해 내면 깊숙한 신념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든 ‘에고’를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런 인식을 시작으로 ‘에고’에서 한 발짝 떨어져 사실을 바라보니 ‘생명 자체는 소중한 것이며 사랑받아 마땅하며, 모든 부모는 완벽하지 않기에 생긴 사건 자체의 문제’임도 보였다. 또한 ‘어머니가 떠나간 것이 내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님을, 태어남 자체로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건의 재정립을 통하여 바라보니, 오랫동안 나를 얽매어왔던 ‘죄인’이라는 인지오류와 죄책감의 감정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이와 동시에 해묵은 감정들이 소화되면서 항상 공허했던 내 내면에는 어느 새 따스함과 자유로움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앤코이를 통해 변화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나의 인지 체계와 내면은 질책과 분노에서 이해와 수용을 기반으로 나 스스로에게 사랑을 주려는 태도로 변화되었고, 나와의 관계가 호전되니 타인과의 관계 또한 변화가 생겼다. 상대방을 판단하려는 태도가 아닌 이해를 기반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태도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또한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며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에 방법을 알려주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앤코이 교육재단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합니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찾아가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연대 보증으로 인한 상속 빚을 내게 모두 짊어지게 하고 떠나갔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 빚이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성인이 된 후에 법원으로부터 ‘이행권고결정문’을 받고 아버지의 연대 보증의 빚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하신 지 수십 년이 지나 파산신고 기한이 끝났음과 동시에 당사자가 채무를 안 날로부터 현재의 본인의 재산 안에서만 갚도록 보호 해주는 ‘한정승인’ 법이 있었으나 내가 미성년자 시기에 법적 부모로 행정이 되어있는 어머니가 나를 제외하고 본인 스스로만 ‘파산 신고’를 함으로 법원의 행정상 미성년자 당시 법적 주체를 자녀가 아닌 어머니로 본다는 판례로 인해 19살 성인이 되어 빚을 알았다는 나의 진술은 인정되지 않았다. 부모가 ‘파산 신고’를 한 날로부터 ‘한정 승인’ 신청 기간이 지났다고 판단함으로 ‘한정승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 성인이 된 나는 법원과 판사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억울함과 동시에 사회와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은 감당치 못할 원망과 분노로 이어지게 하였다.
되돌아보니 내가 상황을 인정하고 다시 일어서고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앤코이가 말합니다’의 ‘앤코이가 말하는 성장이란’ 글 중 ‘현재에 머물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기보다 현재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사회적 낙인과 부정적인 시각으로 만들어졌을 나의 에고를 보내 버리고, ‘마음의 병’은 누구나 생길 수 있으며,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님을 재정립하며 용기를 내어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현재에 머무는 것’ 이것이 내 내면의 진실과 솔직함과 대면하게 해주며 사회적 시선과 에고를 이길 힘을 주고, 정확한 인지와 자기 내면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하는 시작임을 확신한다.
올해 5월 지속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병원치료와 앤코이를 통한 이번 내면 아이와의 체험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슬픔’과 ‘보고 싶음’의 감정으로 전환시켜 주었다. 그리고 정말 쉽지 않았지만 아주 작은 용서의 마음의 불씨를 가지고 두려움과 무서움과 동시에 용기를 가지고 어머니를 찾아가 보자는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번호도 정보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주민등록초본의 사항만을 가지고 집을 나섰고, 산언덕에 있는 낡고 허름한 집에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어색한 기류와 동시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간 정리된 마음을 전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던 것인데,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작고 열악한 환경과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마음이 쓰라리며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떻게 얘기를 풀어나갈지 걱정이 많았던 나는 ‘앤코이가 말합니다’의 ‘갈등 상황에서 중용의 입장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기’ 글을 참고하기로 했다. 타인을 비난하는 형태의 소통 방식이 아닌 나 자신의 핵심 욕구를 파악하고 ‘나 전달법’의 방식으로 얘기하기로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해 갔었고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버렸다는 생각에 슬펐었고 법적인 문제로 인해 억울함과 마음이 상처 입고 아팠어요”라고 얘기를 전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반복되는 말과 함께 법무에 대한 본인의 감정적 미숙했던 일에 대한 상황과, 미숙했지만 나를 보고 싶은 마음에 계속 간직해 왔던 나의 아기 때 사진을 보여주었고 이에 오해를 이해로 전환하여 나는 어머니가 ‘부모로서 미숙함이 있었고 이에 대한 죄책감이 있어 그동안 나를 찾아 올 용기가 없었겠구나’라는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트라우마에 용기를 내어 직면한 이 경험은 나의 분리되어 있던 내면 자아들의 연결뿐만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각부터 바뀌어 스스로에 대한 소중히 여김과 믿음과 자신감을 기반으로, 강인한 마음과 타인까지도 이해와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너는 너자체로 소중한 존재란다>
내가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핵심 가치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렸을 때 고모의 손에서 컸다. 길러주신 고모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항상 불안의 감정이 크고 타인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성격이었다. 고모로부터 일부 물리적인 측면의 양육을 제공받을 순 있었으나, 그녀는 사실 관계에서의 심리적 표현과 감정적 교류가 서툰 사람이었다. 당시 나의 내면에는 실수에 대한 불안과 버림받을 것에 대한 불안이 있었는데, 당시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나의 순수 의식은 무시한 채, 타인과 사회의 이미지와 시선에 시선을 두며 ‘완벽한 나’, ‘예의 바르고 착한 나’, ‘화는 나쁜 것이며 고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착한 것’ 이라는 신념과 핵심 가치를 가지고 열심히 생활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고 공모전 수상을 하며 고모의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정작 나의 내면에는 불안과 두려움과 공허함 뿐이었다. 마음이 날이 갈수록 무겁고 지치며 너덜너덜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정폭력피해가정에 드리고픈 메시지’의 글을 보며 알아차려진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내가 당시 양육자였던 고모의 태도나 가치, 혹은 행동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동일시 하여 ‘내적 투사’를 했다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어서 혼란과 불안의 감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나는 고모와 다른 자유의지를 가진 하나의 객체임을 인식하고, 그동안 고모와 동일시 해왔던 정신적, 정서적 부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이 상황을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는 타인이 아닌 나의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들여다보게끔 만들었다. 시점의 전환은 되었지만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생겨난 수많은 ‘분리된 자아’들은 나의 순수 의식과 내면의 감정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고, 수많은 ‘갈등’으로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게 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했다. 갈등을 해결해 갈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뿌리 깊게 박힌 생각과 그 결과를 되돌아보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정과 누군가 나를 떠나갈 것이라는 불안의 감정이 뒤섞인 이것은 무엇일까 들여다 보았다. 그러다 인지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떤 조건을 채워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수 년간 그 분리된 자아의 투사대로 노력해 온 결과가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내 마음에 충분한 사랑이 채워지지도 불안이 해소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직면할 수 있었다. ‘앤코이가 말합니다’의 ‘앤코이가 말하는 성장이란’의 글과 ‘가정폭력피해가정에 드리고픈 메시지’의 글이 이것을 직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글을 보면,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의 태도를 가지라고 제안하며, 조건부 사랑이 아닌, ‘조건 없는 사랑'을 일깨운다. 자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고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알려주고 있다.
나는 매일 잠자기 전 “무언가 더 안 해도 돼 ㅇㅇ야”,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있는 그대로 소중해 ㅇㅇ야”를 말해주었고 나의 ‘삶의 핵심 가치’를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에고’의 힘에 짓눌려져 있던 순수 의식에 힘을 가져다주면서 바뀌어진 삶의 핵심 가치의 입장에서 ‘에고’와 갈등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었다.
먼저 나는 ‘에고’에 ‘Z’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배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해와 호기심,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Z’는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분열되어 있던 자아들의 갈등이 해소되어 가면서 내면의 자아들이 통합됨을 느꼈다. 갈등을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고모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고모와의 관계 또한 풀어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고모와 대화를 하기 전 나를 향한 고모의 ‘사랑의 여부’와 ‘사랑의 표현방식’을 생각해 봤다. 고모에게는 분명 본인의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거두어 양육하겠다는 깊은 사랑과 책임감이 있었다. 한편 고모가 가진 정서적 교감에 대한 미숙함을 인식하게 되면서, ‘고모 내면에 상처가 있지 않을까? 더 알고 이해해 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고모에게 다가가 “저를 거둬주시고 키워가기까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는 누가 뭐래도 저를 키워주셨기에 고모가 저의 친엄마라고 생각해요.”라고 첫 말을 건넸다. 고모는 울음을 터트리셨고 갑작스러운 울음에 나는 매우 당황했지만 그 울음 속에서 나를 향한 사랑이 느껴져 고마움과 마음이 따뜻함으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지긋이 두 손을 잡아 드렸다. 이후 나는 ‘고모’와 ‘나’는 각각의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얘기하며 기존의 양육방식은 오히려 내게 정서적 불안을 만들었다는 것을 차분하게 말씀드렸다. 그리고 고모로부터 자신 내면의 ‘상처’,가난, 학업에 대한 좌절, 고통스러웠던 시집살이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고모의 ‘불안’이 어디서부터 발생을 하였는지 그 심리를 더 알아차리고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고모와의 관계가 호전되어 ‘친구’ 같이 정서적 거리가 가까운 사이로, 서로의 의견과 감정을 존중해 주며 마음의 어려움과 힘듦을 나누고 공감하며 응원해 주는 관계가 되었다.
<욕구를 알아차리는 ‘예민함’과 갈등을 관리하는 ‘세밀함’>
나는 ‘예민하다’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한자사전을 보면 ‘날카로울 예’와 ‘민첩할 민’의 합성어로 날카롭고 민첩하다는 뜻으로 국립국어원이 발행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드라마나 일상생활에서 많이 언급되는 ‘왜 이렇게 예민해?’ 등과 같은 뉘앙스로 인해 단어 본질적 의미가 아닌 부정적 느낌이나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정신적·심리적·육체적 각 부분들이 건강했을 때 ‘예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프거나 건강하지 못하면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속도도 느려질 뿐더러 감정은 무감각해져 느끼는 것이 둔해지며 몸 또한 움직임이 둔해져 모든 일의 수행에 있어 어려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민함’을 장점으로 발전시키되, 사람에 따라 예민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가 다르기에, 예민함을 적절히 관리하고 각 사람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예민함’을 ‘강점’ 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내가 ‘에고’에 가려진 깊은 내면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이를 이해하고 수용했던 경험과, 어머니와 고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던 모든 과정들이 바로 내 ‘예민함’을 장점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킨 좋은 예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관계에서의 욕구를 빠르게 알아차리고, 갈등을 관리하고 해결할 수 있는 강점을 만들어 주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프로그램 출연>
18살 때 ‘강연자’로 CBS에서 주관하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프로그램에서 강연을 했다. 일명 세바시의 PD님과 연이 닿아 기회를 얻게 되었고 항상 삶에서의 경험과 배움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 속에서 느끼고 깨달은 것을 세상에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승낙하고 강연장에 올랐다.
‘앤코이가 말합니다’의 ‘앤코이가 말하는 성장이란’의 글에서는 감사와 나눔은 현재 받은 것들을 증폭시키고 풍요롭게 해주며 나누는 만큼 받게 되는 것이 있으며 함께 성장한다고 말한다. 이 글을 통해 되돌아보니 나는 세바시 강연을 통해 나눈 것 보다 받은 것이 갑절로 많았음을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었는데, 먼저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강연 준비 과정에서는 ‘즐거움’과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꼈고 강연을 진행할 때에는 가슴에서의 ‘뜨거움’과 ‘신나는’ 감정을, 강연이 끝나고는 ‘뿌듯함’과 ‘가슴 벅찬’ 감정들을 느꼈다. 나누며 알게 된 이 감정들은 내가 ‘발표’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인문학 강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생성시켜 주었다. 또한 강연을 들은 청자들 중 내게 “감사해요”라고 말하고 간 청자가 있었는데 내 속에 뿌듯함과 따뜻함이 채워짐을 느꼈고, 받고자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으나 어느새 내 마음은 ‘행복감’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채워짐의 경험은 감사와 나눔의 가치를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내 삶의 원동력 중 하나의 요소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현재에도 지인들과 대학 후배들의 깊은 가정의 사연들을 공감과 지지를 해주며, 내가 삶에서 배운 것들을 나누고 싶어 개설한 ‘나를보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삶에서의 깨달음과 노하우들을 나누어 가고 있다. 이후 또한도 금번 앤코이를 통해 성장한 나의 이야기를 나와 같은 환경을 가진 이들을 포함한 용기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갈 것이다.
세전메: <“잘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잘해야 돼”라는 암묵적 강요를 세상에서 받아왔다. ‘좋은 대학교를 가면 다 잘될 거야 공부 열심해 해야 돼’, ‘먹고 살려면 공부를 잘해야 돼’,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어’ 등이 있다.
회사나 사회에서는 조건부로 어떤 일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기준에 따라 함께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의 마음을 지치게 하고 사람 존재 자체로서 본인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시킨다.
어떠한 목적을 위해 필요로 하는 부분인 것이지 그 목적에 맞지 않았다고 해서 본인 존재 자체가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소중한 사람이다. 본인을 조건부가 아닌 조건부 없는 사랑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 주자. 그동안 사랑받고 싶어 노력했고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아 울어왔던 내면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다독여주자.
있는 그대로의 본인의 모습 또한 수용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랑해 주기 시작할 때, 모든 변화는 시작된다. 본인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를 비난에서 이해와 수용으로 바꾸어 주며 힘든 일을 마주했을 때 나의 자아가 내 편이 되어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응원과 지지를 해줄 것이다. 본인을 향한 사랑은 본인에 대한 믿음을 만들고 더디더라도 기다려줄 수 있는 ‘나’로 성장시킨다.
사랑은 배움과 성장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게 하며 바뀐 초점은 믿음 기반 위에 배움과 성장의 즐거움과 행복감을 만들어 줄 것이다. 본인의 부족한 부분들을 마주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발전시킬 수 있을까?’라는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며 부족함의 발견을 ‘골치 아픔’이 아니라 배워가고 성장해 갈 ‘즐거움’으로 전환시켜 줄 것이다. 이렇게 이어진 발전은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 받게 하니 걱정하지 말고 잠깐 멈춰 서서 ‘잘해야 돼’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조건부’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해 보자.
위 모든 내용은 내가 직접 겪고 적용해 보며 변화를 체험한 경험을 기반으로 쓴 것으로 금번 ‘세젠메’ 영상제작의 기회는 ‘나를 보다’라는 내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의 취지와도 같았음과 동시에, 삶에서 배운 감사와 나눔을 실현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노블 내면의 소리함'을 작성하며 영상 주제를 선정했다. ‘잘하지 않아도 돼’로 주제를 선정한 이유는 이 말은 그동안 ‘잘해야 된다’고 요구받아 왔던 세상에 대한 ‘에고’를 멈추게 함과 동시에 ‘사랑’에 대한 내면 깊은 체험과 깨달음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용기이자 시작이라 생각했다. 이 영상 보는 모든 분들이 ‘따뜻함’과 ‘자유로움’을 느끼고 ‘용기’를 얻어가셨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 봅니다.
<마지막으로 재단에 전합니다.>
‘앤코이가 말합니다’의 글은 나의 마음에 ‘간질간질함’을 주는 것을 시작으로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주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가려웠던 부분들과 응어리져 있던 답답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내게 ‘용기’를 주었고 적용해 보며 나를 더 깊게 사랑하고 알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앤코이’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을 해주었고 항상 경직되어 있는 내게 ‘부드러움’과 ‘편안함’을 주었다. 어느덧 내게 ‘앤코이’는 ‘마음을 다독여 주는 친구’로서 받아들여져 있었다. ‘앤코이 교육재단’ 을 만난 것과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저의 내면의 성장에 도움을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