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기 선발자) 너무나 많은 사건사고들로 가득한 현 시대에, 인류의 진정한 방향성과 치유의 근간이 바로 ‘의식성장’이라는 심오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장**
2024-09-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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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에 앞서서...>
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저는 20년간 에고와 저를 ‘동일시’ 해왔던 사람입니다.
우연한 계기로 인터넷을 통해 앤코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사실 이 신청서를 쓰기까지의 결심과 계기는 그저 ‘우연’ 아니라, 그동안 에고의 베일에 감춰져 있던 저의 “순수의식”이 저를 이곳으로 이끈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관련 게시물과 신청서의 질문들을 처음 살펴보고 정말 충격을 금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질문을 보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거지..?” “ 나에 대해서라고? 살면서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등등 이런 생각만 들었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나란 무엇일까?” “나의 내면의 소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많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참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Chat gpt의 도움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물어보기도 해보고 어떻게 도움을 받아보려 해봤는데 오히려 안하느니만도 못했습니다. 실제로 나오는 것도 없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재단의 취지에 맞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재단의 게시글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워도 한 글자 한 글자 입으로 소리내며 읽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진짜 너무 어려운 책을 읽는 느낌이 들어 제가 집중력이 이렇게 안좋았나? 아님 내 머리가 멍청해서 이해가 안되는 건가? 심지어는 이런 거 해서 뭐해... 어짜피 너무 늦게 발견해서 해도 안 뽑힐 거 같은데... 이런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며 제 내면의 소리로 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원인 모를 정체의 무언가가 방해했습니다.(하지만 신청서를 읽으면서 이 원인 모를 정체는 바로 “20년간 나를 경쟁 사회의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시킨 실체 없는 환영” 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과 정신적 분리의 충격>
앤코이를 접한 이후 변화된 저의 모습이 너무 놀라워 게시글을 읽고 제가 느낀 생각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에고란 무엇인가요?'라는 게시물을 읽고,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과 정신적 분리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의 에고의 본질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순간’ 저는 당시 제가 도서관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헤에에 와.. 미친” 이라고 육성으로 너무나도 크게 말해버렸습니다. 솔직히 너무 놀랍고 한편으로 너무 공감되고 에고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던 나의 모습들이 한꺼번에 수 십개씩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아 이게 이래서 그런 거구나..!, 이게 진짜 내가 아니었구나 말도 안돼..'(예를 들면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너무나도 많은 생각으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린 경험, 고등학교 때 성적이라는 두 글자에 목매달고 살았던 기억, 엄마 아빠, 학교 선생님의 말이 절대적인 법칙인 줄 알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춰 지금 대학교의 전공을 선택하게 된 과정의 경험, 무슨 일을 하던 사소한 것이라도 인정받으려는 나의 모습.. 심지어 어린아이에게 까지 열등감을 느끼며 인정받으려는 모습까지.. ,어떤 일이든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여야 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자동적으로 시스템화 되어서 수년간 나를 지배했던 경험들..) 이런 반응이 머릿속에서 폭죽을 터트리는 것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선형적인 제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동시에 저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내가 추구해왔던, 저의 오랜 신념과 관점들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형성된 나를 휘감싼 휘장들이 에고의 입맛에 맞춰 칠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순간 그 자리에서 돌이 된 것 처럼 온 몸이 굳어 깊은 고뇌의 시간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도서관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도 내가 한 행위가 사회적 규율을 어겼다는 것에서 나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 등의 그런 감정 또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뇌와 폭죽과 같이 떠오르는 에고의 모습들이 떠오르는 것을 촉발제로 하여 이 신청서를 써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느꼈습니다. (아마 이 또한 나의 순수자아가 에고를 짓밟고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이 신청서를 쓰라고 엄청난 의지의 힘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게 조차 하지 못했고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던 제 고민들이나 경험을 적어 내려가면서 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귀울여서 에고에게 뻇겼던 제 정체성의 주권을 다시 되찾고 싶어졌습니다. 신청서 작성에 앞서 20살의 성인의 시작을 맞이한 저에게 이런 감정과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낌과 동시에,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거울 속의 나(ego)가 아닌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순수자아’로서의 나의 모습에 대해서 온전히 탐구해보고 저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립니다.
<과거 기억의 재구성>
20살 앤코이를 만난 저의 시점으로 과거의 저를 떠올릴 때 나타나는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인정욕구 그 자체였습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헤겔은 말하지만 제가 발견한 모습들은 본질의 나가 아닌 에고로서의 나를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중학교2학년 당시 전교1등을 하고 이를 부모님께 보여드렸을 때의 표정이 기억납니다. 그 아이는 그게 참 좋았나 봅니다.. 그 이후로는 그 아이는 성적과 사랑에 빠집니다. 자신이 아니라 단지 부모님이 기뻐해서, 성적이 높으면 뭔가 우월해진 것 같다는 ‘그 느낌’에.. 그리곤 6년을 그렇게 삽니다. 그 아이에게 성적과 대학은 전부였습니다.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면 나보다 우월한 존재, 못하면 열등한 존재, 거들떠도 안 봤습니다. 고등학교 당시 그 아이에게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모의고사를 보면 매번 1등하던 친구였던 그 친구의 꿈은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였습니다. 그 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의대를 갈 수 있는 성적임에도 2년 내내 같은 반이어서 지켜본 결과 그의 꿈은 확고했습니다. '의대를 왜 가? 나는 지구과학을 사랑해...’
그 친구는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 같은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면 안되... 그저 낭만없이 죽을 뿐이라고.” 당시의 저는 이해되지 않았고, 오히려 '나중에 너는 후회할 거야, 내가 맞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젠간 올 거야.' 라며 자신의 옳음을 합리화 했습니다. 아마 이는 에고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겠지요.
수능이 끝나고 그 친구는 예상대로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를 갔고 자신의 확고한 꿈인 교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능을 망쳤고 시험장을 나오며 반수를 결심합니다. 그때는 무조건이라고 느껴졌던게 지금은 아닐 때가 많음을 깨닫습니다. 반수 또한 2학기때 기숙학원을 들어가 준비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앤코이를 만나고 생각을 정리해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동안의 나는 에고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임을 깨닫고 반수의 마음을 접었습니다.
저는 과거의 그 아이가 이해했거나 인식했더라면 좋을 것들을 고민해보았습니다. 가장 크게는 지금껏 자신이 타인이 규정한 나로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으면 합니다.또 시험을 못 보면 슬프고 서럽고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이 '너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슬퍼하도록 속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단지 취업이 잘된다고 해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을 듣고 지금의 전공을 선택한 것이 사실 너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고 신청서를 쓰면서 내가 그 분야를 좋아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오히려 앱 개발자라는 진로를 찾게 되어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가치충전>
저는 위의 상처들에 새살을 돋게 하기 위해 충전할 가치를 ‘자유’와 ‘우정’으로 꼽았습니다. 눈을 감고 중립적인 마음으로 책상위에 적힌 메모지들 속 가치들과 하나가 되어보았습니다. 나의 이기심으로 대학교에 와서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혼자가 된 모습, 그동안 나의 자유의지로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사이사이 빈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처음엔 의심이 갔지만 해보니까 숨겨진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작은 상흔들을 뭔지 모를 에너지가 치유하는 뭔가 충만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관조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얻게 된 변화, '알아차리기'>
어제 저녁에 미용실을 가기 위해 비가 오는데 버스를 탔습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없이, 일종의 패턴이나 습관대로 무작정 휴대폰을 꺼내서 인스타그램이나 카톡, 유튜브를 봤겠지만, 앤코이 게시글을 읽고 나서부터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에 “투자”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시작한 이후로 제 안에 무의식적 자동 매커니즘을 알아차리게 되기도 하고, 때로 멍 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종종 느꼈습니다. 즉 머릿 속에 에고가 언제 작용하는 지, 언제 순수의식으로 존재하는 지를 인지할 수 있는 힘이 조금은 생긴 것 같습니다. 무작정 휘둘리지 않고 내가 지금 휘둘리기 직전의 상태이구나...라고 알아차림으로써, 뭔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저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핸드폰을 안본다고 굳이 불안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이것 또한 오랜 시간 에고에게 길들여진 나의 패턴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핸드폰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저 멀리로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안키면 불안하고 유튜브, 쇼츠 한번 보면 몇 시간씩 보고 그랬는데, 뭔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습니다.)
어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면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는 상태이구나, 그러는 와중에도 현재의 내가 이 감정의 나라고 동일시 하겠다는 마음은 없고 그냥 멍하니 그 상태에 대한 인식에 주의를 두게 됩니다. 감정에 압도되지 않고, 또 다른 감정과 생각이 오면 “어? 이번엔 이러한 감정이 올라왔네..."라고 알아차리는 동시에, 이전의 감정이 저 멀리 떠나간 것을 관찰하는 과정을 자주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의 집착의 대상들에 대한 관망과 그 대상이 발현하는 일종의 “패턴”을 자각하자 더 이상 그것 때문에 자책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로 인해 성욕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크게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성욕이 마음에 떠오른다면 “어 오늘도 왔구나? 또 곧 지나간다.” 이러면서 압도되지 않고 그 에너지로부터 한 걸음 멀어져서, 동일시 하지 않고 그저 “자각”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감정과 욕구를 부정하지는 않되, 거기에 에너지를 주지 않은 채, 그저 마음속 한 공간에서 멍하니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다 보니, 어느새 그것은 저기 멀리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제 고민들의 근원에는 “에고”가 있었음을 깨닫고 나를 갉아먹는 씨앗에 누가 물을 주는지 알게 됨으로써,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형성되어온 나의 거짓된 모습과 신념을 해체하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온전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나다움’>
1950년 한국전쟁을 치르고 사람들은 그 누구도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2024인 지금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으며 마침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그들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저는 누군가 저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서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이냐 묻는 다면 ‘사회가 만든 우리의 욕망, 경쟁심, 비교의식’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지난 수 십년간 우리의 윗 세대가 만든 당연한 풍토의 경쟁 의식과 그토록 ‘평균’에 집착한 것, 성공을 향한 욕망 비교 의식 등의 일종의 사회적 구조는 어쩌면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해 ‘누군가’ 교묘히 주입해왔던 가치들일지 모릅니다. 그 결과 이는 한강의 기적으로 실현됐고 세계는 우리를 향해 기적이라고 대단하다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너무 빨랐던 성장에 대한 부작용이 지금의 세대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듭니다. (이제는 거부감만 드는 과거의 인식과 사회구조를 지금의 세대들에게 강요하니 청년들에게 비의지가 나타나고 비존재 속 분리된 자아의 투사들에게 갇혀 수많은 은둔형 외톨이를 낳는 것은 아닐지요..)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뀜에 따라 지금의 ‘비존재’가 우리를 아래로의 끌어당겨 자기 초월의 포기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필연적일지 모릅니다. 윗 세대가 만든 이원성의 세계에서 양극단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달려가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어색한 일이고 어렵기만 합니다. 그 결과 SNS 쇼츠중독,도파민 중독, 자살, 마약중독 등 수많은 문제로 나타나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누군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사회구조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제는 우리의 의식이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잘못된 방법을 올바른 방법으로 바꿔나가야 할 때임을 인지하는 게 지금 사회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먼저 우리가 만약 사회 시스템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여기에 원인을 둔다면 개개인 자신은 뭘 해도 현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매번 자신의 틀을 탓하고 시스템에 굴복해버릴 테니까요.. 또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은 매우 오래걸리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기도 하구요..
완전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제가 생각하는 해답은 바로 “진정한 나다움” 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세상에 의식성장을 통해 지속적인 자기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 ‘진정한 나다움’을 깨닫는 이들이 많아지고, 이런 ‘진정한 나다움’을 창조성으로써 발현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론머스크가 발견한 나다움을 통해 세상에 퍼뜨린 창조성은 수많은 개개인을 변혁시켜 연쇄적으로 또 다른 창조성을 발생시켰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휴면스토리’라는 유튜브 채널 또한 사회 속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다큐로 제작하고 메시지를 담음으로써 영상을 보는 많은 이로 하여금 비존재로부터의 이끌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의식성장의 과정을 통해 찾고 ‘진정한 나다움’ 즉 자신의 순수의식을 찾고, 상위단계의 자아로서 이를 창의력이라는 초월적 에너지로 세상에 퍼뜨릴 때, 이는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어 많은 이들로 하여금 비존재와 비의지로부터의 독립이 가능하게 함을 믿습니다. 개개인의 성장된 의식과 내면의 목소리가 모여 이를 창조성으로 사회에 발현할 때 우리 사회는 또 한 단계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창 시절 내내, 가정과 학교라는 공간에서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정신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학창시절 속에서 제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 항상 외부의 기준들과 타인이 만든 가치들에 의해서 외면 당해왔습니다. 그들이 짠 각본과 틀 속에서 마치 트루먼쇼를 하는데 그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고, 20살 성인이 된 이제야 그게 트루먼 쇼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방식의 잘못됨의 근원은 잘못된 방향성입니다. 즉 외부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사랑과 가르침을 전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나 교사 입장에서는 잘못되기를 직접적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백지상태의 자녀와 학생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것들로 하여금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성적을 잘 맞아와서 부모님께 말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기뻐합니다. 주변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이냐며, 그 친구는 공부를 잘하는 친구냐며,, 이런 것을 은연중에 물어보십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태도가 불성실하다거나 성적이 낮다고 전화가 들려오면 나에 대한 태도가 바뀝니다. 나를 향한 본질적인 사랑은 변하지 않았음을 알고 단지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잘 되었음에 그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착각” (성적이 높아야 나를 더 사랑해주시구나!,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꼭 될거야!) 들이 내가 아닌 가짜 나를 만들게 되고 나는 그들이 만든 ‘나’로 수 년간 살게 됩니다. 저는 수년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이라는 이미지에 기반해서 삶의 모든 선택들 또한 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최근 대학에 와서도 1학기를 다녔는데 학기내내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모습이 이기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저도모르게 주변 친구들을 “경쟁자”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했기에 성적은 4.5만점을 받아 석차 1등을 했다고 [석차조회]란에 떴습니다.하지만 이 앤코이를 만나고 지금까지 내가 했던 선택의 우선순위는 “성적” “우월감”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순간 나 자신이 너무 안타까워 성적표를 보고도 기쁜 감정이 들지 않고 너무 외롭고 슬퍼 울었던 것 같습니다.
신청서를 읽고 그동안의 모습이 에고에 의한 모습임을 깨닫고 2학기 때부터는 성적만을 바라보고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자녀에게 의식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
저는 저희 부모님께서 저와 제 동생에게 사랑과 연대, 가족이라는 소속의 안정이라는 가치를 준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그 가치를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외부적 기준대로가 아니라, 내면에 귀를 기울인 사랑, 그리고 진심 그대로,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가족이 주는 소속과 안정감도 좋지만 우리 가정과 다른 가정 사이에 “차단막”을 두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가정은 그동안 너무나 우리 가정만을 보고 살았기에, 가족만이 전부인 줄 알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주변의 다른 가정을 보면 가까이하지 않거나 멀리 피하거나 의심부터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가정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녀에게 일깨워 주십시오..그러면 가정과 가정사이의 자녀의 눈에서 연결고리가 보일 것이며 이는 가정,친구,공동체의 의미 확장 즉 모든 사람이 하나에 기반한다는 본질적인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나를 생각하고 주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자녀에게 의식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외부의 가치로 자녀의 머릿속을 채우지 말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도록 나자신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내면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 임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자녀의 삶에서 여유가 찾아올 때 경쟁과 성적 이기심 대신, 아이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세요.)
<나의 순수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 경험>
저의 강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1. 매우 성실하다. 2. 공부를 열심히 한다. 3.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사소한 것도 잘 기억한다. 4.시도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5. 자신감이 있다. 6.친화력이 좋다 7.경험을 통한 성찰을 잘한다...등 외부적인 잣대로 판단하였을 때 즉 이 ‘세계’의 언어로 표현했을 때 강점이라고 말할 만한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에고가 아닌 “참 나”에 대해 알게 된 지 얼마 안되었지만, 그래도 세상의 정의가 아닌 앤코이의 ‘정의’ 속에서의 강점을 생각해본다면 저의 강점은 타인을 향한 사랑의 가치를 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입니다. 과거의 나의 경험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니, 이제서야 그것이 나의 순수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앤코이 게시판의 글을 읽고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하는 지에 대한 답도 내린 것 같습니다.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발견한 저의 나 자체의 모습과 이를 발현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혁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저의 모습을 통해서 저는 순간순간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데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노인복지 앱개발에 대한 방향성을 구체화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의 비전과 공동체 번영을 위한 사랑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사회가 만든 줄세우기, 취업 , 스펙 등 이런 가치만을 맹목적으로 쫓지 않고, 제가 가치를 둔 기준 안에서 새로운 정의의 스펙을 쌓고 싶습니다.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비전입니다. (안정성을 벗어나는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살아있음과 이게 나의 본질이구나 하는 느낌의 희열이 다가옵니다.)(관조의 태도로 위의 경험들을 바라보니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른 주체라고 느껴졌고, 저를 제약했던 숨겨진 믿음을 발견했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 속에서 삶의 목적성을 찾았습니다.)
<세전메: 신청서를 쓰면서 너와 내가 느낀 혼돈의 감정을 평화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법>
저는 앤코이재단의 모든 신청자들에게 “신청서를 쓰면서 너와 내가 느낀 혼돈의 감정을 평화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법”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에고의 존재를 깨닫고 너무나 혼란스러웠는데 이 혼란을 넘어서는 하나의 도약의 방법을 신청자들에게 알려주고싶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저는 신청서를 쓰면서 에고의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저의 순수자아와 에고의 위치가 “역전”되는 느낌이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깨달은 일종의 상위단계의 자아로 가는 의식의 흐름의 과정을 모두에게 공유하고자 하였고, 모두가 그 끝엔 모든 게 하나이며 사랑이며 그 기반은 개개인의 의식성장이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일종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내면의 소리를 계속해서 외면한다면...>
제가 두 번째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당신도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메세지는 제가 읽은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내용 중 인상깊은 부분에서 촉발되어 떠오른 심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앤코이에서 말하는 “의식성장 및 에고의 본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영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우리가 계속해서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고 타인에 의해 규정된 외부적 가치들로 자신을 정의하고 에고에게 휘둘리다 보면 당신도 언젠간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 총책임자 였던 ‘아이히만’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신청서를 쓰면서 과거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게 내면의 목소리였구나 라고 깨닫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앤코이라는 기회가 오지 않아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여전히 나 자신이 에고를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지배당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궁금증은 앤코이의 게시글 중 “나치즘”에 대한 내용을 읽고 생각하다가 하나의 답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게시글의 내용중 나치즘에 대한 내용을 읽고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아이히만” 이라는 사람인데요, 평범한 노동자 였던 그는 단지 친구의 제안에 따라 나치로 들어가게 되고 나치가 자신에게 수여한 임무(유대인 학살 총책임자)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유대인에 대해 어떤 원한도 없었고 단지 자신은 그저 “명령대로” 시키는 일만 근면성실하게 했다며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로 이끈 자신의 죄를 “무죄”라고 그는 법정에서 주장합니다. “명령대로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으니 나는 무죄다..” 충격적인 이 말에 대한 고뇌와 함께 동시에 제 머릿속에는 어쩌면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결국 에고에게 잠식당하면 “아이히만”은 나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모든 이들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 채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일을 하는 삶의 끝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그 끝에는 아이히만 스스로가 자신이 한일이 대학살이라는 것에 대한 실상을 직접 유대인들의 시체를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나는 죄를 짓지 않은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존재이다” 라고 말한 것 처럼 그 끝엔 에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함으로써 계속해서 지배당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아이히만이 했던 것처럼 무사유를 통한 주체성상실의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가 느낀 감정과 내면의 소리의 중요성을 하루 빨리 느꼈으면 좋겠고, 그렇게 된다면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4기 지원자의 <갓생살기> 라는 세전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있는 경력단절의 엄마가 자신의 삶을 저렇게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음이 너무 멋지게 다가와 이를 계기로 앤코이 재단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던 거 같고, 저또한 그런 선순환이 되고 싶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것>
앤코이의 [에고란 무엇인가요]를 비롯한 여러 글들을 읽으며 제가 느낀 감정은 놀라움과 충격이었습니다. 나의 real self(주인)이 “노예(ego)”의 존재를 깨닫는 동시에 이 둘의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느낌! 뭔지 모를 자기모순의 느낌과 '내가 그동안 주인이 아니라 노예였단 말인가?' 라는 충격적인 역전의 현실을 인지하고 심연으로 빠져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과정에서 하나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의 평온을 찾았으며 그동안의 수많은 이원성과 비교에서 벗어나 부끄럽지만 144단계 중 상위단계에 도달해가는 저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궁금해하고 보이기 시작함) (결론적으로는 우주의 근원에 자리 잡은 “사랑”의 가치를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모든 것이 하나이자 사랑임) 주인과 노예라는 관계의 역전으로 인한 충격으로 멈췄던 발걸음은, 그 의미를 곰곰이 숙고해 보는 과정에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 머릿 속 주인(순수자아)와 에고는 관계의 역전을 통해 서로가 각자의 입장이 되어봄으로써, 이제는 중립적인 관찰자 입장에서 에고를 바라본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시선이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노예의 각각의 자각이 나라는 존재를 비롯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한 매커니즘으로 작동할 때 즉 “두 개인”에게 모두 일깨워질 때 이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관계, 즉 '진정한 관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 진정한 성숙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인의 자각이 서로에게 일어나면 양자(내면,에고)(나, 타인)는 자기중심성의 관계에서 이동해 내면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고귀한 존재로 바라볼 때, 서로는 서로에게 고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 저는 어쩌면 앤코이가 추구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고귀한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개개인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의식성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개개인의 의식성장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 나가며 서로를 고귀한 존재로 인식하며, 동시에 자연스럽게 에고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줄여 더 많은 이의 의식성장을 촉진하는,,, 나아가 나의 고양된 의식이 너를 진정한 너로 만들어 주고 너의 고양된 의식이 나를 진정한 나로 만들어 주므로, 나와 너는 둘인 동시에 “하나”로 존재함을 깨닫고, 이러한 생각들은 나와 너에서 “우리”라는 공동체적 관점으로 확장되고,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깨닫는 경지에 도달하는,,,(모든 것이 의식 안에서 연결되어있다는 걸 깨닫는..) 어쩌면 앤코이가 상위 자아에 도달하여 우리를 만든 창조주의 목적성을 인식하고, 이러한 연결성과 그의 의도를 가지고 지금의 위대한 과업을 하고 있는 거 같다고 느꼈습니다.
최근 저의 관심이 나의 내면을 향하고 의식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탓일까 저는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주는 무엇이고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와 우주를 관통하는 본질적 가치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나를 의미 있게 해준 모든 것이 타인의 사랑에서 발생하였음을 깨닫고 나 또한 그들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를 비롯한 타인을 진정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그 거룩한 과정에 앤코이와 함께 참여하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이 느껴졌습니다.(어쩌면 저는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결심한 후 급격히 가속화하는 에너지와 일별을 느껴 매우 매우 혼란스러웠다가 이를 생명의 강 흐름을 따라 신속히 이동해나감으로써 무언가 다른 것으로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저는 지금 너무 충만하고 자유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