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코이에게 전합니다

6기 선발자 세전메: 호밀밭 끝에서 아이들을 지키다.

나** 2025-10-01 18:45 조회수 아이콘 13




아래에 쓴 것과 같이 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 영향으로 청소년기까지 영향이 미쳤는데 아동청소년극 예술교육을 통해 ‘존재하는 나’ 자체를 느낄 수 있었고, 작은 자존감과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앤코이의 메시지 중 “가정폭력 피해가정에 사랑을 담아 드리고픈 메시지”를 접했을 때, 내 마음 깊은 곳이 뜨겁게 반응했다. 이 글이 단순한 위로를 넘어 진짜 ‘이해’로 쓰였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내가 가진 경험과 진심을 담아, 누군가의 절벽 앞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메시지를 앤코이에 전하고 싶은 이유는, 내가 느꼈던 그 위로와 회복의 가능성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처럼 과거에 갇힌 아이들이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임을 느끼길 바란다. 이 메시지는 내가 예술을 만나 치유된 순간들과, 아직 절벽 끝에 서 있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진심이다.

 

<내면 아이와 마주한 나의 치유 여정>

나의 어린 시절에 기억은 가난하고 어두웠으며 끔찍하게 아팠다. 어릴 적 실수로 엎은 컵라면에 나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울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서러웠던 건지 내 가난함에 대한 울부짖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가족들은 언제나 나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고 나조차도 익숙하게 지내던 도중 난 언젠가부터 형용하지 못할 회의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능력 해서, 못생겨서, 내가 나이기 때문인가? 멈추지 않고 나를 덮쳐오던 회의감들은 자기혐오로 변질되었고 그런 혐오들은 내 속에서 우울과 분노를 일으켰다. 회의감과 우울함이 심해진 건 이때쯤 (중학교 2학년)이었다. 가족이나 타인이 내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다고 판단하면 (물리적 폭력 행사뿐만 아니라 정신적 폭력도 해당) 길거리를 배회하다 낯선 사람을 만나 하악질을 하며 경계하는 고양이 마냥 위협하고 분노했다. 점점 나를 짓눌러 오는 우울에 견디지 못한 나는 나 자신을 버리기로 결심했었다. 매일을 고민하고 두려움에 떨며 잠을 설치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날에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학교를 갔다. 내 마음은 이미 추운 한강으로 가있었지만 막상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떨어진 발걸음. 그렇게 마음 다 잡고 간 한강에선 결국 죽지 못했다.

가족과 싸우고 소리 지르며 분노한 나날들은 사실 누군가가 내 아픔을 알고 잡아 주길 바랐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지 못한 이후에도 내게 돌아온 것은 가족들의 폭언과 폭력이었다. 난 산 송장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내가 제일 믿지 못했으며 제일 믿었던 사람들에게 받는 배신감이란 이뤄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나의 분노는 결국엔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결핍에 의해 생긴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은 병원 치료를 통해 중학생 시절보다 많이 안정되었다.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고전소설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다.

변신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잠자가 죽기 직전 새벽이었다. 잠자는 가족에게 외면 당하고 아주 담담하게, 평화롭게 스스로 방에 들어와 고통에도 개의치 않아 했고 오히려 그 고통들은 사그라들고 텅 빈, 무의 상태의 사색에 잠겨 차디 찬 새벽을 묵상하였다. 이 부분은 마치 내가 잠자의 방 한 구석에서 주인공을 관망하는 것 마냥 가슴이 미어지고 답답하였다. 그리고 잠자가 숨을 거두고 그런 잠자를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더욱이 희망차진 가족의 모습을 보며 괜시리 먹먹하여 속으로 열분한 기억이 있다. 잠자의 수입으로 먹고 살던 잠자의 가족들은 잠자의 생산성이 낮아지니 그를 짐짝 취급을 하며 결국 그를 외면하고 만다. 생산성이 그의 가치의 척도가 되었고 가족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던 그였지만 생산성이라는 가치의 척도 하나로 가족들에게 버림 받은 잠자의 달관한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으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해서 곱씹게 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변신은 나에게 찝찝한 결말과 함께 묘한 동질감을 남겼다. 변신의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는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였다. 실존주의 문학이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을 부조리로 보고 본질보다 구체적 실존을 중시하려는 사상이다. 위에 말한 것처럼 이 책을 읽었던 시기에 난 굉장히 괴로워하며 나 자신의 대해 의심하고 나 자신이 존재함에 부정을 일삼았었다. 그 때의 나는 이 책을 읽고 더부룩한 끝을 남기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 나의 내면을 위로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혹여나 예전의 나처럼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지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픈 좋은 작품이다.

이처럼 책 이외에도 나는 유튜브나 타인의 생각들을 담은 글들을 읽으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며, 함께 분노하기도 하고 나의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려고 노력해왔다. 이제야 나는 내가 왜 그토록 분노하고 우울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족에게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 했으며 그걸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쉽게 다루거나 분노하는 둥 잘못된 방법으로 갈구한 것이었다. 앤코이가 말합니다를 읽으며 나는 놀라거나 공감하기도 하였다. 장학금 명목으로 쓰는 신청서에 자기의식 고양을 위한 글들이라는 것에서 놀랐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내가 무엇을 원했고 왜 분노로 그것을 표현했는지에 대해 생각한 부분과 비슷해 공감이 가기도 하였다. 가장 인상 깊던 글은 < VI) 가정폭력피해가정에 앤코이가 사랑을 담아 드리고픈 메시지 ♡>이다. 앤코이의 글을 읽으며 내 내면에서는 어떤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 일었다. 그것은 무언가를처음 알게 되어 놀라는 감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 안 어딘가에 존재했지만 말로 표현되지 못했던 감정과 진실이 마침내 언어로 명확히 설명되는 것을 마주한 순간의 떨림이었다.

나는 가정폭력 속에서 자랐다. 부모로부터의 꾸준한 폭언과 무관심, 방임, 통제는 내게 어린 시절부터나는 사랑받지 못해도 되는 존재라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무감각해지는 법을 익혔지만, 내면에서는 분노와 수치심, 두려움이 소용돌이쳤다.

앤코이의 글에서 처음 마주한 단어내면 아이, 마치 나를 정확히 지칭하는 듯했다. 가난하게 자란 나에게는 컵라면 하나를 흘린 것이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고, 가족에게 소리 지르고 분노했던 날들 역시 결국은나 좀 안아줘, 사랑해줘라는 절박한 표현 방식이었다는 걸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늘왜 나는 이렇게 힘든가라는 물음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앤코이의 글을 통해 처음으로내가 힘든 것이 어쩌면 나만의 잘못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상처받은 내가 오히려 회복과 성장을 통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특히가해자는 어제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말은 내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폭력성에 대해 처음으로 새로운 시야를 갖게 했다. 부모님도, 조부모 세대도 제대로 치유받지 못한 채 각자의 상처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 나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사명을 느꼈다.

나는 그동안 의식 성장을 위해 문학, 연극, 심리학적 독서, 감정 글쓰기 등을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해왔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느낀 절망과 통찰, 아동청소년극 무대에서존재하는 나로 인정받았던 경험, 혼자서 감정을 분류하고 정리했던감정 라벨링훈련, 그리고나는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되뇌며 자기최면을 걸듯 스스로를 껴안았던 시간들은, 나를 무너뜨리는 대신 단단하게 만들었다.

예전의 나는 매일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살아가며진짜 나를 만나는 것이 삶의 방향이라는 것을 안다. 내면 아이를 인정하고,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보고 표현하는 것, 무조건적인 용서를 강요하기보다내가 얼마나 아팠는지먼저 나 자신에게 고백하고 허락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의식 성장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앤코이의 글은 나에게 단순한 정보나 위로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통로였다. 한때 내면에서 절망의 언어만 오가던 나에게, 다른 언어, 다른 시야, 다른 존재 방식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나는 지금도 치유의 여정을 걷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며 나아가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처럼 방황하는 누군가에게, “괜찮아, 너는 정말 잘 버텼어. 그리고 너는 여전히 귀한 존재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앤코이 교육재단의 비전은 단순히 장학금을 주는 기관이 아니라,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관점과 살아갈 용기, 더 나은 길을 제시하는 동반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재단이 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가치와 시야를 제시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 새로운 관점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조금씩 정비해가며회복의 가능성을 살아 있는 사례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불완전했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그것은 내가 고통을 견뎌낸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마침내 그것을 삶의 방향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의식 성장이며, 내 삶의 진정한 기적이다.

 

<나는 왜 사는가, 행복을 위해 산다>

사실 난 이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위에 말한 실존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만 나의 생각들의 기저에 깔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본질에 앞서는 생명을 가진 존재인가? 어째서 실존해야 하는가?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이 질문에 대해 생각 해보았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꼭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지만 이내 접어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밥을 먹는가? 배가 고프니까. 그럼 배는 왜 고픈가? 신체의 에너지 생성을 위하여. 그렇다면 신체 에너지 생성은 왜 해야하는 것인가? 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가?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생존만 하면 되는데 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가? 생존만이 우리가 사는 이유라면 영양소가 풍부한 맛없는 채소와 퍽퍽한 닭가슴살만 먹고 살면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맛있는음식을 찾는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배부르다,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이 아닌 행복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럼 나는 행복한가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한다. 어린 시절 행복하지 못했던 시절들의 영향일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고, 가족의 폭언과 무관심을 당연히 생각하며,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은 무엇 하나 이뤄보지 못한 나의 어린 시절. 나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적었다. 사랑 받지 못한 감정, 무시된 욕구, 당연했던 폭언과 무관심이 나를 둔감하게 만들었다. 행복은 나에게 사치인냥, 부정적 감정에 빠져 사는게 당연한 것 마냥 행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 내 안의 상처받고 불행한 내면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나는 행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내 과거를 이해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어린 시절의 나를 가족들이 돌봐주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 극복해 나가고 싶다또한 거창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 위에 말한 것처럼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봄에는 봄내음에 행복하며, 여름엔 푸른 녹음에 싸여 행복하고, 가을엔 색색이 알록달록한 단풍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겨울엔 폐까지 얼 것 같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쉴 수 있어 행복하면 된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돌볼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나만의 기준으로 행복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나를 다시 세우는 여정>

사실 난 이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위에 말한 실존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만 나의 생각들의 기저에 깔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본질에 앞서는 생명을 가진 존재인가? 어째서 실존해야 하는가?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이 질문에 대해 생각 해보았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꼭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지만 이내 접어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밥을 먹는가? 배가 고프니까. 그럼 배는 왜 고픈가? 신체의 에너지 생성을 위하여. 그렇다면 신체 에너지 생성은 왜 해야하는 것인가? 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가?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생존만 하면 되는데 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가? 생존만이 우리가 사는 이유라면 영양소가 풍부한 맛없는 채소와 퍽퍽한 닭가슴살만 먹고 살면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맛있는음식을 찾는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배부르다,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이 아닌 행복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럼 나는 행복한가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한다. 어린 시절 행복하지 못했던 시절들의 영향일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고, 가족의 폭언과 무관심을 당연히 생각하며,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은 무엇 하나 이뤄보지 못한 나의 어린 시절. 나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적었다. 사랑 받지 못한 감정, 무시된 욕구, 당연했던 폭언과 무관심이 나를 둔감하게 만들었다. 행복은 나에게 사치인냥, 부정적 감정에 빠져 사는게 당연한 것 마냥 행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 내 안의 상처받고 불행한 내면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나는 행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내 과거를 이해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어린 시절의 나를 가족들이 돌봐주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 극복해 나가고 싶다또한 거창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 위에 말한 것처럼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봄에는 봄내음에 행복하며, 여름엔 푸른 녹음에 싸여 행복하고, 가을엔 색색이 알록달록한 단풍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겨울엔 폐까지 얼 것 같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쉴 수 있어 행복하면 된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돌볼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나만의 기준으로 행복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상처와 희생을 넘어 꿈을 향하여>

어릴 적부터 궁핍한 생활을 이어왔고, 어머니와 함께 기초수급자로 살아왔다. 신청서에는 가족들이 나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가족이 그렇게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었다. 어머니는 시절 쉽게 없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집에서 살았고, 교수와의 과외를 받으며 명문대 피아노과에 입학했었다. 60년대생인 어머니는 소아마비 환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유복하게 살았는데도 어머니는 할머니의 무관심으로 재활을 하지 못했었다. 어머니는 뼈만 남은 얇은 다리와 절뚝거림을 자신의 약점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이처럼 유복하게 지냈던 어머니는 남편과의 만남에서 무너지기 시작했었다. 순결을 빼앗기고 반강제로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에서 아빠가 다른 언니 둘을 낳게 되었었다.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불행할 정도였었다. 바람과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 의해 어머니는 재떨이에 머리를 맞아 꿰매기도 했고, 큰언니는 공부를 잘하던 우등생이었지만 중학교 가출했었다. 거기에 할아버지의 사업까지 망하면서 어머니의 상황은 더욱 좋아졌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지금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아이들을 책임져주겠다는 말에 결혼을 하게 되었었다. 하지만 결혼 살아보니 아버지는 능력도 돈도 없는 음식점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받은 가정폭력으로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의부증 같은 정신병을 앓게 되었고, 아버지는 많이 힘들어하셨었다. 내가 태어나기 , 작은언니는 아빠를 친아빠처럼 따랐지만 내가 태어나자 언니는 뒷전이 되고 나만을 챙기는 엄마의 태도에 언니는 나를 미워했었다. 어머니는 40살에 나를 노산으로 낳으셨고, 내가 6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도망가셨다고 했었다. 어머니는 나를 돌려달라고 울면서 빌었고, 결국 양육권은 어머니가 가지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양육비를 번도 주지 않았었다.

아무 능력 없이 작은 언니와 나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심한 정신병으로 인해 우리를 방임했었다.

작은 언니는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불량 학생이 되었었다. 이후 많은 날이 지나고 복지를 통해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우리 가족도 괜찮아지기 시작했었다. 물론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갈 정도였지만, 작은언니가 성인이 되어 나와 어머니를 책임져주었었다. 작은언니는 밤에 나가서 일을 했고, 남들이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보냈을 20대를 우리를 먹여 살리며 보냈었다. 그에 대한 죄책감과 고마움, 미안함을 느껴왔다.

그렇게 언니의 도움으로 나는 무사히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있었고, 예전보다 나아진 생활에 안심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난치병에 걸리셨다. 원인을 없는 면역 반응으로 여러 장기에 혈관염이 생기는 만성 전신 질환이었다. 실명이나 마비,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를 있는 시한폭탄 같은 병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자신이 죽을 것을 상정하고 보험금 이야기를 꺼내셨다. 태어날 때부터 때문에 힘들었는데,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도 이야기를 하시는 들으면서 회의감과 슬픔이 밀려왔었다.

어릴 가족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용서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미안함과 고마움도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이상 가족들에게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누구에게 손을 벌릴 없어 스스로 생활비를 벌며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빠듯했고, 내가 목표로 하는 직업을 위해 다녀야 학원에 돈이 부족해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장학금을 신청하게 되었다. 부족한 형편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결정이었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기부자분들께 단순한 감사 이상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누군가의 삶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이고 사랑인지 알게 되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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