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코이에게 전합니다

6기 선발자 세전메: 행복을 목적지로 삼던 저는, 이제 자각을 동행자로 삼았습니다.

조** 2025-10-07 03:00 조회수 아이콘 16

존재의 방향을 다시 살펴보며



앤코이 6기 세전메: “왜 사는가?”에 대한 나의 이야기, 의심 그리고 확신

이 영상은 제가 살아오며 반복했던 “행복을 향한 맹목적 질주”를 처음으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고 되묻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세전메 신청서를 쓰던 중 마주한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제 감정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분명 좋은 가치입니다. 다만 저는 그 단어를 ‘나를 채찍질하는 도구’처럼 사용해 왔습니다. 늘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미래의 ‘이상적 나’를 위해 지금의 고통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저는 행복을 좇았지만 정작 나 자신과는 한참 멀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자각 없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자동차처럼요.

그때 앤코이의 말씀이 제 삶의 ‘브레이크’가 되었습니다. “삶은 만족이 아닌 자각의 여정이다.” 이 한 문장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고, 저를 다시 ‘지도’를 펼치게 했습니다. 이번 영상에 저를 직접 담아낸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누구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그동안 눌러 왔던 제 진짜 마음을 꺼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싶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앤코이에 전하고 싶은 이유는, 앤코이가 단지 장학금을 주는 곳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을 함께 탐색하는 동반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찰은 제게 큰 용기를 요구했지만, 그 과정을 인정하고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영상입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삶을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진심으로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아울러, 우리 사회가 ‘성과 중심·정답 중심’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왜 사는가’에 솔직히 답하기조차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저 역시 점수·스펙·취업 가능성으로만 자신을 규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앤코이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정답의 외피가 창의적 시도를 덮고, 타인의 시선이 우리를 검열하게 만드는 문화는 개인의 자존감과 사회의 다양성을 동시에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메시지가 저만의 고백으로 머무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깨어 있는 하루가 쌓여 깨어 있는 사람이 되고,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깨어 있는 사회를 만든다고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저의 진심이 그 여정에 작은 불씨가 되기를 바라며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작은 대화에서 알아차린 에고의 균열, 성과의 잣대로 나를 재던 습관]

 저는 최근 친구와 토익점수 관련한 사소한 대화 속에서 제 에고의 단단한 껍질 하나가 금이 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토익 공부를 막 시작한 저는 500점대 점수를 받았고, 해커스 온라인 기준에서 입문자 레벨이 650점부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건 뭐, 시작도 못하게 하네. 500점대도 기준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푸념하자, 친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500점대는 바보 수준으로 만드나?” 농담이었지만,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가슴 깊숙이 박혔습니다. 저는 웃으며 “뭐? 내가 500점대라고 바로 바보 취급이야? 내가 어떻게든 성공해서 보여준다, 증명할 거야”라고 받아쳤지만, 그 대화를 계기로 제 안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이어 “나도 예전엔 500점대였어. 그런데 그렇게까지 긁히는 걸 보니, 그게 생각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는 건가?”라고 했고, 저는 “개구리 취급까지 해버리네? 내가 진짜 보여줄게”라며 장난스럽게 답했지만, 그 대화는 제 안 깊숙이 숨어 있던 불안과 열등감, 증명 욕구를 비추는 작은 균열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스스로를 점수와 성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을요. 친구의 말에 반응한 것도, 사실은 제 안에 이미 그런 기준이 견고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저는 끊임없이 더 나은 성적을 요구받고 비교당해왔습니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마트폰을 뺏기고 폴더폰을 쓰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형에게 공부 안 한다는 이유로 혼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은 “두드려 패서라도 영어 성적을 올려준다”는 과외 선생님에게 저를 맡기셨고, 저는 매일같이 힘들어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래도 공부는 해야지”뿐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결심 끝에 과외를 끊고 혼자 공부하겠다고 요청했고, 인강을 들어야 하니 스마트폰으로 바꿔달라 부탁했습니다. 모든 사교육을 끊고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성적은 오히려 더 좋아졌고 부모님께 처음 칭찬도 들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고, 칭찬 한마디가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그즈음부터 저는 ‘잘났음을 증명하고, 성공해서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와 대학에서 되풀이된 프레임]

 군대에서도 같은 프레임이 작동했습니다. 사람의 내면이 어떻든, 보이는 일 수행 능력과 유머, 입담으로 “에이스”와 “폐급”이 나뉘는 걸 보며, 저 역시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갔고 “에이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역 후, 한때 에이스였던 제가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무기력감이 밀려왔고, 끊임없는 자아 성찰 끝에 비로소 그 강박을 자각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고, 성격·감정·사고방식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과거의 환경과 사건들을 되돌아봤습니다. 그럼에도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 저는 또다시 성과와 수치 중심의 삶으로 회귀해 있었습니다. 전 학기 4.5라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성공을 위한 챕터 하나를 마무리했구나’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나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엘리트”가 되기 위해선 나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오래된 관성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앤코이를 만나다: 전환의 문장들]

 그런 와중에 ‘앤코이’를 만났습니다. 사실 처음엔 스펙을 챙기고 재산을 늘릴 방법을 찾다 우연히 들어간 사이트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이런다고 내가 달라질까? 사회는 바뀌지 않는데?’라는 의심부터 들었지만, 그런 질문조차도 결국 사회의 기준에 저를 가두는 방식임을 곧 깨달았습니다. “의식 성장은 본래의 진정한 의식으로 회복하는 과정.” 이 문장은 제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저는 성공과 인정만을 향해 달려왔고, 사회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존재 가치라고 착각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나’가 아니었습니다.

[Having/Doing에서 Being으로]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음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동안의 방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물음은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저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자신을 재단하지 않고,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가’를 먼저 묻기 시작했습니다. 앤코이의 말씀 중 “Having과 Doing을 추구하던 방식에서, Being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문장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소유해야만 존재의 가치가 입증된다고 믿어온 저에게, ‘존재의 방식’에서 출발하는 변화야말로 제가 놓치고 있던 중심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비의지와 자기 검열을 마주보다]

 “삶의 중요한 결정을 자기보다 나은 다른 이들이 해주길 바라는 비의지, 그 무기력함”이라는 경고는 제 안의 회피 습관과 마주하게 했습니다. 성과와 평가의 프레임 안에서 저는 제 삶의 주체로 살지 못하고 늘 ‘더 나은 기준’에 삶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완벽,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에 대한 고정된 기준으로 창조적 노력 자체에 평가와 판단을 적용함으로써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자기 검열의 문화”라는 표현은 제 지난날을 정확히 비추었습니다. 성적과 스펙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저는, 그 문화의 단면이자 피해자였음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깊이로]

 “내면의 진실과 만나는 시간 없이는, 존재의 깊이로부터 살아갈 수 없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제 삶이 얼마나 ‘깊이’와 멀어졌는지 절감했습니다. 오직 ‘성과’라는 수면 위를 맴돌던 저는 지금, 조금씩 그 깊이를 향해 내려가고 있습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진심으로.

[다짐: 빛으로 살아가기]

 이 글은 ‘좋은 성적을 가진 성실한 학생’의 기록이 아니라, 제 내면을 회복하고자 애쓰는 한 존재의 용기 있는 기록입니다. 앤코이가 말하는 “나의 존재가 곧 하나의 빛”이라는 믿음을, 저 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겠습니다. 성과가 아니라 존재에서, 비교가 아니라 자각에서,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진실에서 출발하는 삶을 하루하루 연습하겠습니다.

[‘행복’의 속도에서 ‘자각’의 방향으로]

 저는 한동안 ‘행복’을 위해 살아왔다고 믿었습니다. 왜 좋은 대학인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왜 좋은 직장인가? 돈을 잘 벌기 위해. 왜 돈을 벌어야 하나? 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누리기 위해. 결국 모든 질문의 끝은 ‘행복’이었습니다. 이 단순한 도식을 삶의 구조로 받아들인 채, 저는 ‘이것도 다 행복을 위한 성장통’이라며 내면의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습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의 궤도 위에 있었지만, 그 길 위에서 저는 공허했고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를 앤코이의 말씀이 비춰 주었습니다. “삶은 만족이 아닌 자각의 여정이다.” 행복은 도착지가 아니라, 나를 인식하고 이해해 가는 여정 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삶의 정답은 없다. 다만 생의 의도를 자각하며 살아가는 자만이 매 순간의 선택을 삶으로 바꿀 수 있다.” 라는 말씀 앞에서 저는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라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꺼내 들었습니다. 나는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나 자신과 타협해 온 건 아니었는지, 그 목표가 ‘불안’과 ‘비교’를 가리기 위한 방패는 아니었는지 되물었습니다. 그 질문들을 통과하며 저는 ‘행복을 추구하는 삶’보다 ‘깨어 있는 삶’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불행을 피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주어진 하루를 진심으로 살아내는 일. 어떤 감정이든 억누르지 않고 바라보며, 매 순간이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것—그것이 제가 믿게 된 ‘만족’에 가까운 삶입니다. 이제 저는 성과나 수치가 아니라, 내면의 자각으로 삶의 방향을 점검하려 합니다. 아직은 서툴고 때로는 이전의 방식으로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 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깨어 있는 하루가 반복될 때, 존재의 방식은 조금씩 달라진다.” 이 진실을 붙들고, 오늘도 저는 저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상처에서 자란 감수성, 돌봄으로 확장되다.]

 저에게 주어진 강점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입니다. 이는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관계와 경험 속에서 자라난 저만의 깊이입니다. 치매를 앓으시던 외할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하시며, 저는 자연스럽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제2의 부모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할머니를 더 자주 뵙기 위해 찾은 요양원에서의 봉사는 처음엔 수단이었지만, 코로나로 대학 생활이 멈춰 방황하던 저를 단단히 붙들어 준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저는 다른 어르신들과도 가까워졌습니다. 손을 잡고 안부를 묻고, 소소한 하루를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울림이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저는 성과 중심의 삶에서 처음으로 ‘결과 없이도 느껴지는 기쁨’을 배웠습니다. 앤코이의 말씀을 통해, 존재 그 자체가 이미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저의 예민함과 상처 역시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경험은 제 전공 선택을 ‘기술’에서 ‘사람’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다루는 전문가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회복의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특히 노인 물리치료 분야에서 흔히 목표로 삼는 ‘현상 유지’를 넘어, 더 나은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보행 보조도구의 개선, 맞춤형 중재법 연구 등으로 어르신들의 자립적 생활을 돕는 것이 저의 비전입니다.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연구는 더디고, 현실은 종종 고집스럽습니다. 그러나 앤코이가 일깨워 준 대로, 진정한 기여는 ‘존재의 방식’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감수성과 상처, 봉사의 시간, 그리고 이 전공을 선택한 진심을 품고, 작은 빛이라도 오래 비추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이것이 제가 받은 강점을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며, 앞으로도 이어갈 저의 방향입니다.

[앤코이 재단에 전하고 싶은말: 지원서를 넘어, 제 삶을 다시 세운 시간]

 이번 세전메 영상과 신청서를 준비한 과정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제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 깊은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 온 내면을 조심스럽지만 정직하게 마주했고, 마음 깊은 곳에 오래 잠들어 있던 질문들이 하나둘 깨어났습니다. 신청서를 쓰며 처음으로 제 삶의 방향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고, 그 물음에 솔직히 답하려 애쓰는 동안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막막했고 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생각하는 나’와 ‘살아내려는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 자체로 큰 선물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행복’을 좇아오면서도 왜 마음이 공허했는지 처음으로 분명히 보였습니다. 방향 없는 질주였고,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저는 삶의 태도 자체를 되돌아보았고, 진심으로 변화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영상을 찍어 제 삶을 설명해 본 이 전 과정은 장학금을 위한 준비를 넘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설령 선발되지 않더라도 이 경험은 제게 더없이 귀한 양분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앤코이 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앤코이를 단순한 장학재단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을 함께 고민하고 이끌어주는 동반자로 느꼈습니다. 도움을 넘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다시 묻게 만든 존재이기에 더욱 고맙습니다. 이 시간을 마무리하며 다짐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의 자각과 감정을 잊지 않고 살아내겠습니다. 단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빛으로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이런 시작을 허락해 주신 재단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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