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코이에게 전합니다

4기 플래티넘 선발자 <세전메: 앞으로 직관을 더 발전시켜 에고를 더 작게 만들고, 제 근원이 사랑에서 온 것임을 인식하며 더 큰 존재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한** 2023-09-25 21:25 조회수 아이콘 939

<앞으로 저의 직관을 더욱 발전시켜 에고를 더 작게 만들고, 저의 근원이 사랑에서 온 것임을 인식하며 더 큰 존재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Y01cLCkAXA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영상이 새창으로 열립니다.-

(*한ㅇㅇ양께서 이 세전메 영상을 유투브 '전체' 공개 게시하는 것에 동의해 주셨습니다. 자발적 기여와 나눔, 재단에 대한 헌신, 개방성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세전메 영상에 ‘노블 내면의 소리함’을 작성하는 제 모습과 작성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메시지로 담아 보았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가장 큰 자유와 가장 큰 기쁨을 느꼈고,  제 마음에 힘이 생기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저에게는 글을 쓰는 것이 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외면적 가치가 더욱 중시되는 세상에서 내면을 살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 또한 엔코이가 아니었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을 후순위로 미뤄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노블 내면의 소리함’을 작성하며 느낀 자유로움과 행복감을 공유하고, 우리 모두가 조금 더 내면의 소리를 살펴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글을 쓰는 모습 뒤에는 수험생활 전, 러시아로 교환학생을 가서 혼자 여행하면서 찍었던 여행의 조각들,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가족들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찍었던 영상들과 함께 제가 느꼈던 아름다운 순간들과 감정들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던 장면들이 나옵니다.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잊고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모두가 이런 아름다운 조각들을 잊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보았습니다.


<힘겨웠던 과정에서, 엔코이를 만났습니다.>

작년 여름 독서모임을 만들어 공정, 시민교육, 공동체의식에 대해 글을 쓰고 이야기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큰 기쁨을 느꼈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 앞에 놓인 수험생활, 경제적인 문제, 진로에 대한 고민, 어쩔 수 없이 경쟁 속에 들어가야 하는 제 모습이 모순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들 아래 저는 다시 이런 희망과 문제의식을 저 편으로 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합격과 불합격, 성공과 실패와 같은 두 갈래의 길 사이에서 저는 에고의 목소리에 잠겨 괴로워했습니다. 2020년에 시작했던 수험생활이 올해 6월에 끝났습니다. 아직 성공과 실패 여부도 모르는 상황에서 큰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혼란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제가 걸어온 길이 내면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경쟁에서 조금 더 앞서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길 끝에 제게 남은 것은 너덜너덜해진 마음, 거듭된 실패로 인한 열등감이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제 마음에 귀를 기울였는지, 정말 이 길로 가고 싶은지 생각해보며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제 마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엔코이를 만났습니다.


‘엔코이가 말합니다’의 글들을 읽으며 저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세상에 느꼈던 의문점들과 불편함, 그리고 문제의식들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었습니다. 마치 이정표가 생긴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에고의 목소리에 휘둘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엔코이의 글들을 읽으면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에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가만히 그 목소리를 관조하고, 그것이 정말 제 직관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제 미래에 완전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아니지만 ‘노블 내면의 소리함’을 써내려가며 저는 행복했습니다. 글을 쓸 때 가장 나답다는 것, 그리고 제가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던 꿈인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실천하고 변화를 만드는 삶’을, 제 삶의 방향으로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엔코이가 말합니다’의 글들은 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삶의 방향성과 가치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자꾸만 에고의 목소리에 굴복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저의 직관을 더욱 발전시켜 에고를 더 작게 만들고, 저의 근원이 사랑에서 온 것임을 인식하며 더 큰 존재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원성을 넘어 연대라는 가치를 향해>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개봉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화려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아카데미시상식에 올랐고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 있었던 제가 자랑스러운 마음을 품고 영화를 보러 갔던 날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어딘가 모르게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선’이라는 요소를 통해 여러 가지를 나눕니다.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풍요로움과 부족함, 지상과 지하. ‘냄새’로 상징되는 계급의 차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없앨 수 없는’ 것으로써 그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마저 좌절시킵니다. 생존마저 처절하고 비인간적인 근세의 모습, 각자 능력이 있지만 거짓 위장 취업을 해야만 하는 기택 가족. ‘선을 넘지 말라’며 이들을 타자로 배제하는 박 사장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많은 것들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는 성적으로 기숙사를 나눴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공부를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오랫동안 학습한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학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태도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혐오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몇 가지 특징으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것이 우리의 본성이자 세상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이분법적인 사고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이것이 엔코이가 말하는 ‘에고’의 목소리이고,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어쩌면 저는 이분법적인 사고 아래 ‘더 좋아 보이는 것’을 취하고자 노력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 쪽에 있기 위해 노력했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에서는 ‘외모가 뛰어난 사람’ 쪽에 있기 위해 노력했으며, 러시아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는 스스로를 ‘아시아인’으로 규정짓고 더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못했습니다. 3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험생활을 하면서는 ‘수험생’과 ‘비수험생’으로 세상이 나뉘어 보였습니다. 이런 사고는 제 마음을 병들게 했고, 병든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엔코이가 말합니다’의 글들을 보며 저는 제가 어렴풋이 느껴왔던 저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의 문제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이를 인식하고 난 후에도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행동방식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낙오가 곧 죽음으로 이어졌기에, 더 생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세상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세상은 이제 원시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 우리 사회는 더 자유롭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분법적인 사고, 이로 인해 비롯된 서로에 대한 혐오는 <기생충>에서 기택이 박 사장을 살해하고, 결국 지하 벙커로 숨어들어가듯이 분열과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서로를 경쟁상대로 바라보게 하며, 세상을 제로섬 경쟁의 장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정치란 무엇인가요? 정치는 더 좋은 의사결정,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구입니다. 정치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소수의 권력을 위한 것도 아니며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는, 그리고 정치를 바라보는 사회 구성원들의 시각은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망각하고, 분열과 권력싸움만이 남아있습니다. 자유로운 의견이 오가기보다 의견에 낙인을 찍기 바쁘고, 건강한 토론보다 색깔을 나누기 급급합니다. 우리는 학교생활에서 잘 외우고 문제를 잘 푸는 방법을 배워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누구도 정치주체로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시민으로 성장한 개인은 자본주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기 쉽습니다. 저는 최근 한 세금 환급 대행 서비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서비스는 아주 간단한 세금 환급 서비스를 대행해주고 마치 ‘공짜로 돈을 받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수수료를 무려 20%가량 받습니다. 세금은 의무이자 국가가 운용되는 방식으로써 우리가 시민으로서 알아야할 기본 상식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기에 이러한 무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두려움을 느꼈던 점은, 저 또한 수험과정에서 세금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면 해당 서비스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무능한 시민이 됨으로써 우리가 마주할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뿐, 우리가 정치주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민주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그리고 그 근본에 이원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무한 제로섬 경쟁을 끝내고 건강한 민주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연대의 가치를 인식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상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논리학과 철학, 정치와 사회제도 등에 대해 실질적인 측면에서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우리는 신계급사회를 사회적 문제로 생각하기보다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함정은, 정치와 사회구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개인적 부의 축적, 자기계발, 경쟁에서의 성공으로 돌립니다. 또한 이는 ‘가난 혐오’를 만드는데, 오늘날 만들어진 가난에 대한 다양한 혐오 표현들이 이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가난 혐오는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려는 적대감, ‘능력만 있으면 가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함정 속에서 가난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우리 사회의 연대의식을 약하게 만들어 건강한 발전을 저해합니다. 현대 사회의 ‘젠더 갈등’ 또한 인간을 이분법적인 인식 아래 바라보고, 서로를 타자화하고 배제함으로써 발생합니다. 최근 ‘MBTI 열풍’ 또한 서로를 구분 짓고 정의내리고 싶어 하는 현 세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구분, 즉 이원성은 결코 연대라는 궁극적인 가치에 가 닿지 못합니다.


안드레 바쟁은 프랑스의 영화 비평가로서, 영화 이론에서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로 꼽힙니다. 저는 그의 리얼리즘 영화미학 이론이 우리 삶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특히 네오리얼리즘을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그 표현 방식이 인간과 사물의 실존에 대한 존중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인위적 표현’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그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렇게 구현된 존재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수용하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합니다. 마치 우리 각자가 세상의 창조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바쟁에 따르면, ‘리얼리티의 추구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을 우리들의 삶과 연결 지으며 공감하고, ‘연대’라는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은 곧 사랑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삶과 우리의 삶을 연결 짓고, 사랑하고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원성에서 벗어나 연대라는 가치로 향해 나갈 때, 우리는 삶의 본질을 마주하며 더 크고 무한하며 풍요로운 존재로 발돋움할 수 있습니다.


<나답다는 것은 변화를 수용할 줄 아는 용기>

제가 ‘나답다’고 생각하는 특성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고, 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성취에 대한 욕망이 있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제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저도 모르게 내면화한 사회의 사고방식,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고, 그것들과 제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엔코이에서 말하듯이 저는 제가 교육받고 듣고 자란 생각들을 투사하여 세상과 제 자신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제가 ‘나답다’고 생각하는 특성들도 제가 제 자신에 대해 가진 고정된 이미지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나답다는 것은 세상적 관점으로는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행복, 저라는 '존재'는 계속 변화하며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생각, 느끼는 감정을 제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관조하고 흘려보낼 때, 그 순간 저는 비로소 진정한 저 자신일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 ‘행복해야 한다’, ‘성취를 해야 행복할 수 있다’와 같이 제가 자연스럽게 압박을 느끼는 생각들도 고정된 것일 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어 왔고, 따라서 공부로 성취를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과 사회는 저를 그 고정된 이미지 안에서 바라보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그 이미지가 너무나 갑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한 과정이 너무나도 불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실패’라는 것으로 정의되어진다는 느낌에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자꾸만 어떤 현상을 정의내리고 구분하고 싶었고 스스로의 직관을 믿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렸습니다. 직관에 따른 선택이 아닌 선형적 마음에서 비롯된 선택을 했기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답다’고 규정해놓은 고정된 이미지 안에서 안주하는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기에,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었기에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더 ‘나다운 것’에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엔코이가 말합니다’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노블 내면의 소리함’을 써나가기 위해 생각하면서 저는 자꾸만 다시 제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이분법적인 개념들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제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괴로웠지만 한편 글을 써내려가면서 점점 마음에 기쁨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글을 쓰면서 엔코이가 말하는 직관, 에너지, 내면의 힘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괴로움(고통)이 지복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글쓰기’가 저의 내면과 대화하고 저의 의식을 확장하는 가장 나다운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며 ‘나다운 것’이 고정되거나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다운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 내면을 살피고, '도파민 중독'과 '육체, 그리고 에고와의 동일시'를 벗어나 더 자유로운 의식으로 확장되는 삶을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삶을 추구하며 저에게 찾아오는 변화들을 수용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는 태도가 바로 진정 나다운 것입니다.



<사랑과 연대, 그리고 변화를 만드는 삶>

과거 저는 결핍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한 탓에 마음 속 자리 잡은 트라우마도 많습니다. 그 탓에 인정 욕구가 강하고, 인정 욕구를 채우며 결핍을 가리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 때부터 이어온 장기연애에서 이별을 맞이하며, 저는 제가 가려놓았던 결핍을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가장 의지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관계가 사실은 공허했다는 사실, 저를 채워준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사실은 저를 스스로 의심하고, 직관을 잃어버리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핍을 채우지 못하면 제게 결핍이 끌려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큰 상실감을 느꼈지만, 스스로 일어나야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결핍은 부모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결핍 덕에 저는 제 스스로에게 부모가 되어주는 방법을 앤코이를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결핍은 인생에 큰 역경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그 역경 덕분에 저는 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경을 딛고 일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붓다의 성장 배경에 트라우마와 결핍이 있었다는 사실을 엔코이를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붓다의 삶에 대한 엔코이의 글을 읽으며, 저는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런 트라우마와 결핍을 단순히 부족한 점으로 두지 않고, 이를 통해 저의 삶을 더 확장시키고,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자 강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결핍을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에고와 동일시 되지 않은 진정한 '존재'로서 자각을 가지게 된다면, 서로를 응원하고 협력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연대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방법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것,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전하는 것, 가족들에게 포옹을 전하는 것,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친구가 되는 것. 우리 존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실천하고 싶습니다. 결핍 때문에 괴롭고 트라우마로 무너지더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힘이 있다는 사실을 눈짓으로, 손짓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런 사랑과 연대를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싶습니다. 저는 추진력이 강하고, 예민한 성격 덕분에 문제를 잘 파악하고, 또 그렇게 파악한 문제를 잘 해결하는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점을 발전시켜 사회에 직접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결핍이, 부족함이 아니라 우리만의 강점이 되고, 우리의 삶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좋은 변화를 만들어준 엔코이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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