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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II)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전환하기 위한 이해 (신청서1-①~⑤번 질문의 참고)

앤코이 교육재단 2023-03-11 05:20 조회수 아이콘 497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전환하기 위한 이해(1) 신청서1-①~질문의 참고




삶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은 마치 아름다우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유리잔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삶은 좀 더 이완 되고, 동시에 함께하는 매 순간이 더 소중해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듯, 현재 삶은 많은 고통을 품고 있습니다.

집단의식의 밀도가 높고,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들과 집착이 있습니다.

집단 의식 즉, 문화적 고정관념은 현재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아주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고, 이원적 의식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인지하고 못하고 있습니다.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서는 앞서 다른 게시글에서 일부 다룬 바 있습니다.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지속 가능한 성장 촉진하기


을 배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역경을 통해 배우는 고난의 학교(the school of Hard Knocks)이고, 다른 하나는 참 스승들과 연계해서 이원적 의식을 넘어선, 내면 심리의 해결 즉, 인식 향상의 학교(the school of Self-Transcendence)입니다.

고난의 학교는 사람들이 이원성과 분리의식을 선택한 결과물이지, 본래 신으로부터 설계된 방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삶이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만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의 학교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갈등의 반대 개념으로서 바라보고, 갈등이 없을 때만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여깁니다. 마음 속에서 평화를 경험하는 것은 외부 조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동일한 규칙과 법, 억압이 불가피하다고 여깁니다. 즉 이원론적 관점에서 평화라고 부르는 것을 택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성립된 평화가 실상 평화로운 공존을 강요하는, 힘에 기반한 거짓평화였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집단 의식이란 필터를 통해 그것을 보는 한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집단 의식이 이원론적 극성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에 기반한 평화이든, 비평화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든, 둘 다 정도의 차이일 뿐 갈등과 긴장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내적 해결로 나아가겠다고 언제든지 선택할 기회가 있음에도, 안타깝지만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내적인 해결에 마음을 열고 본래 설계된 방식을 선택하기까지는 매우 강력한 노크가 필요한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더 높은 의식의 분별력

 

종교적 의미를 떠나, 한 가지 질문 드립니다.

깨달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계몽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식 상태입니다.


의식 여정의 낮은 수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여러분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분석적이면서도 선형적인 마음을 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기대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 여러분은 즉시 설명을 원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수준에서는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러나 앤코이가 함께 가고자 하는, 더 높은 의식을 향해 여러분이 만약 열려 있다면, 한번쯤은 선형적인 마음의 한계를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형적인 마음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더 높은 의식의 분별력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항상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항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개념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구형적인 인식, 더 넓은 인식과 비전, 여러분이 현재 가진이해 너머에 있는 이해에 다다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굳이내가 틀렸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상의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빨리 결론 지으려 하지 말고, 이런 전환을 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관련해서 더 높은 이해를 구합니다.”

의식 수준을 높이면 어떻게 됩니까? 알면 알수록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많이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알수록 의식이 높아지고, 집단 의식이 높아지면 이전에는 드러낼 수조차 없었던 더 많은 질문들을(이를테면 신, 영성, 삶, 윤회...)을 공식화할 수 있게 됩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다면, 그것을 보는 다른 방식을 찾고, 다음의 더 높은 이해에 마음을 항상 열어 두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더 높은,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일입니다.



선형적인 마음의 한계

 

수천년 전에 비한다면 현대인들의 인식 수준이 더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세기 전에 비해 선진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생활수준을 갖고 있습니다.

왜일까요삶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과학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사람들이 미신과 폐쇄적인 멘탈 박스를 극복하게 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과학은 선형적인 마음즉 원인과 결과의 측면에서 해석하려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마음에 많은 기반을 두고 있고 유물론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물론자들이 의식의 영향을 무시하는 관점을 과학에 적용하고 직관을 무시하고 싶었던 이유는, 직관이 주관적이고 믿을 하지 않고, 오직 이성적이고 선형적 논리에 기반한 마음만이 객관적이고 믿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주 인위적인(artificial) 판단으로 인해 현대사회에 광범위한 파생 효과가 생겼고,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문제들이 나타났습니다.


유물론은 사실상 실험적 증거가 없고 오히려 과학계가 의식이라는 문제를 넘어서는 것을 매우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뇌의 무의식적 뉴런이 어떻게 의식적 경험을 생성하는지에 대해 이론조차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겨집니다. 

유물론 관점으로는 오늘 날 은하들이 가속화된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고 관찰되고 있는 사실과 인간이 의식을 가졌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에서 특정 현상을 살펴보고 관련 원인을 밝히려고 하는 것은 나름 유효합니다.

유효하지 않은 것은별개의 현상과 원인에서 어떤 일련의 단계를 보고 단순히 그 현상에 대해 알아야 할 건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림으로써더 높은 이해로 확장될 여지를 배제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이념적 덮개를 덧씌워 거기에 어떤 객관적이고 궁극적인 실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서로 연결된 전체적 관점을 놓치게 됩니다.

 

 

과학이 발견한 연결성

 

한편, 양자 물리학자들은 양자 세계에 어떤 것도 별개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실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입자들은 더 큰 전체의 일부입니다거리에 의해 분리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연결되 있어한 입자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먼 거리에 떨어진 다른 입자에도 즉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고립된 현상도 없고 고립된 원인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마음의 투사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라나면서 교육받은 방식이나 혹은 삶은 어떠해야 하고 어떠하면 안되는지에 대해 매우 많은 출처에서 나온 생각들을 투사해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곤 합니다.

우리가 가진 많은 고정적인 개념들이 그 중 하나입니다.

일례로 여러분이 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된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고립된 별개로 보도록 양육되었습니다많은 것이 보여지는 것에 국한됩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물질은 특별한 형태를 띄는 에너지이기에실제로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분자나 세포원자 그리고 아원자 입자들과 같은 아주 작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그리고 기본 입자들은 파동으로도 보일 수 있고입자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 그것은 더 깊은 층에서입자가 아니라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는 서로 다른 진동의 연속체(continuum)입니다에너지 파동은 공간을 통해 확장되고특정한 장소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표현된 것이고이것은 궁극적으로 상호 연결된 상호 의존적인 전체가 표현된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고정된 개체가 아닙니다사실 고정성과 분리감은 전적으로 마음이 만들어낸 정신적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진정 이해할 때세상을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으로, '분리된 자아'가 투사하는 대로 보거나, '에고'의 욕망대로 보는 대신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관찰자'의 위치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직관 역시 객관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식
 

오늘날 현대 사회가 기대만큼 더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 중이고, 수 많은 환경 문제가 생긴 데에는 유물론적 접근으로의식의 영향을 무시하는 관점을 과학에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나라들이 일종의 공백 혹은 교착 상태에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와 과학적인 물질주의에 의해 제시된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마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선형적인 마음으로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오직 구분하고 차이를 찾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삶을 관찰하므로, 이원적 극성이 생기고, 가치 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가치 판단을 하게 되면, 마음이 닫히게 마련입니다.


과학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관찰하는 객관적 과정으로 출발했습니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방법론은 타당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가진 능력의 한쪽 측면에만 해당하는 방식입니다.

최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선형적이고 분석적인 마음뿐 아니라, 직관 또한 세계를 탐구하는데 가치 있고, 타당한 방법임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실제 직관 역시 주관성에서 벗어나 객관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여러분이 의식하는 자아로서, 여러분의 에고의 필터에서 밖으로 물러나, 직관을 경험할 때, 이것은 객관적 경험입니다.

말하자면 논리와 이성을 사용하든, 직관을 사용하든, 현재 보여지는 것을 초월한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 초월한 상태의 경험으로 자신의 기존 마음에 문제를 제기할 것인지, 아니면 가지고 있던 인식들과 사고 방식에 새로운 경험을 끼워 맞추느라, 새로운 경험을 현재 인식 수준에 맞춰 해석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이 주어집니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주된 도구가 무엇인가요? 인간의 마음입니다. 훌륭한 과학자라면 자신의 도구를 알고 그 도구가 가진 한계점도 살펴보려고 할 겁니다.

 

이제 과학자들이 빅뱅이론을 만들었을 때를 살펴보겠습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빅뱅이 일어난 순간에, 모든 것이 무한대로의 작은 하나의 특이점(a singularity)에 압축된 에너지 상태로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 특이점이라는 개념은 선형적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서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이 선형적 마음은 지금의 현상에 있는 복잡성을 관찰한 뒤, 그걸 분해해서 이 복잡성이 더 단순한 상태에서 비롯되었고, 이 상태는 몇 가지 단순한 자연법칙에 의해 나타난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복잡한 상태에서 더 복잡성이 낮은, 근본적인 상태로 돌아가면, 결국 최초의 원인이 있던 곳에 도달한다는 것이 바로 선형적 마음의 관점입니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이 특이점이 바로 빅뱅이라는 대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에 존재했던 그 최초 원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 특이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빅뱅 이론을 만든 선형적 마음에 따르면, 궁극적인 단계이자 원인이 되는 지점이 나올 때까지, 더 단순하고 근본적인 단계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는 마치, 과거 원시스프(primordial soup)에서 번개가 쳐서 최초 단일 세포를 가진 유기물이 생겼다는 논리와 유사합니다. 궁극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말 이런 방식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걸까요? 선형적 마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유일한 설명이겠습니다만, 선형적이지 않은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만약 직관의 마음을 사용해서, 빅뱅, 아니 물질 우주가 나타난 과정이 하나의 특이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물질 우주는 물질계 주파수대보다 더 높은 주파수대 사이에 열린 공간이 생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물질 우주의 에너지들이 하나의 특이점에 압축된 것이 아니라, 물질 우주 주파수보다 더 높은 주파수 영역으로부터 이 물질우주로 에너지가 흘러 들어 올 수 있는 공간으로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선형적인 마음은 이걸 증명해보라고 할 겁니다. ^^

과연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마음에 더 높은 차원에서 흐르는 에너지가 들어오는 통로가 될 잠재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여러분은의식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학 실험에서 증명된 바에 따르면, 아원자(subatomic)입자들이 나타나는 모습은 과학 실험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찰 하느냐에 따라서, 입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파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파동 입자 이중성이라는 개념이 나왔고, 이는 현대 물리학에서 몇 안되는 미스테리 중 하나입니다. 

파동 입자 이중성 개념이 나오게 된 것은, 감각으로 관찰 가능한 거시 세계 개념을 감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미시 세계에 투사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입증했듯이, 모든 물질은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파동입니다.

실제로, 아원자 차원에는 선형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입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보는 방식과, 그에 따른 결론, 그리고 세상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는 마음 속에 갖고 있는 개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긴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얻게 될 힘에 연결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이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에너지가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높은 근원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그것이 여러분 각자의 마음을 통과할 때,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패턴들과 이미지들을 취하고, 그 에너지가 우주라는 거울 속으로 투사됨으로써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중에 물질 우주를 거울에 비교하는 말을 들어본 이가 있나요?

여러분이 마음으로 투사하는 것은 물질우주라는 거울에 의해 반사된 것입니다. 이에 관해 설명하는 의식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세계는 인류의 마음이라는 영사기를 통해 이미지가 투사된 스크린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인류는 모두 공동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구를 외부에서 창조한 더 높은 의식적 존재가 있다고 들어왔고, 인류는 내면에서 지구를 공동창조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대입해 볼 때, 하나의 특이점에 현재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에너지가 압축되었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물리적 진동 주파수 대에 어떤 에너지도 없었기에 물질 우주가 시작되지 않았었던 것이었다는 가설 또한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하나의 특정한 지점이 아닌, 여러 공간 지점을 통해 에너지는 흘러 들어왔고, 그 에너지가 점점 더 큰 덩어리로 합쳐지기 시작하면서 물질 입자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이 더 복잡해지면서 오늘 날 인류가 관찰 가능한 수 많은 은하계가 형성되었구요.

 

우리는 이 게시글을 통해 뭔가 선형적이고 합리적인 마음으로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 직관적 경험의 촉매제가 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전체 에너지장의 일부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 창조자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자각을 통해 의식수준을 높이는 것을 통해, 삶을 바꾸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식은 개념에 한정될 수 있는가


더 높은 의식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안타깝지만 놀랍게도, 종교입니다.

많은 종교들 중 일부는 사람들을 더 높이 끌어올리려는 유효한 아이디어로서, 실제 영적영역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분리와 이원성에 기초한 개념적 마음에 갇힌 사람들은(안타깝지만 과거 기독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개념적 마음의 필터를 통해 가르침을 해석하고 취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마음이 다룰 수 있는 개념으로 바꿈으로써,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꾸중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개념적 마음은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천국으로 인도하는지 외적인 기준을 개념화합니다. 그것은 영적 영역의 실제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마음과도 일치하지 않는데, 여전히 분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많은 신자들을 분리된 상태로 유지시키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원성과 가치판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새로운 방향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신 분들이 많습니다. 

행간에서 말하는 것을 진정으로 듣고자 하는 이들은 알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개념을 창조하는 근원이지만, 개념에 한정될 수 없고, 모든 개념을 초월한다는 것을요.


오랫동안 뇌를 연구해온 과학자들, 그리고 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해온 철학자들을 살펴봄으로써, 이제 현대적인 변화로 도약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의식은 어떤 대상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의식 그 자체를 대상으로 연구할 수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의식은 여러분을 의식하게 하고, 따라서 관찰하고 공동창조하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오직 내면에서 자신을 경험할 수 있고, 외부에서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순수 의식은 중립적인 인식으로서, 여러분은 분리된 자아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으로 뇌 기능이나 의식에 미치는 영향과 같이, 의식의 측면을 연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자신의 순수 의식에 대하여 원격 중립 관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카메라를 사용하여 카메라 자신의 사진을 찍을 수는 없듯이, 의식을 연구하기 위하여 의식을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에 대한 개념을 창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개념적 마음이라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개념적인 마음을 사용하여 개념을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순수의식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고, 더 이상의 것에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자각하는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

 

진정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이것은 하나의 경험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간단한 연습을 하나 제안해 볼까요.

여러분이 여기 앉아서 이 게시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 보세요의자에 앉아 있다면 그것을 인식해 시각화 해보고이제 여러분 마음 밖으로 나가 의자 뒤로 가서 여러분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서 있다고 상상해보세요이제 여러분이 특정 방 안에 앉아 있고자신의 방 밖에서 방 안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대체로 그 방은 어떤 건물 안에 있을 겁니다이제 더 물러나서건물 밖에서 여러분 방과 의자를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더 물러나고 물러나서 보면 여러분은 지구 전체를 볼 수 있고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볼 수 있습니다태양계를 볼 수도 있고 얼마든지 이런 관점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고또 어떤 이는 꽤 쉽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육체와 매우 동일시하고 있어서육체를 벗어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걸 평생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질문 드립니다뒤로 물러날 수 있는 여러분은 누구인가요?

육체에서 물러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정신적으로 육체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제한된 정체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이것은 극장 위의 배우와 유사합니다극장으로 들어가 특정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하고어떤 외적인 개성을 연출하여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여러분의 몸체는 여러분의 의상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질주의자들이 말하듯뇌에서 일어나는 전자기적인 과정의 산물이 아닙니다여러분은 여러분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고 생각도 아닙니다심지어 여러분이 현재 가진 학교나 집안과 관련된 제한적이고 외적인 정체성 마저도진정한 여러분이 아닙니다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일까요?

진정한 여러분은 여러분 존재의 핵심, 자아의 의식적 측면입니다.

 

인공지능과 사람이 다른 이유는 컴퓨터가 자기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자신을 인식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Chat GPT가 나타났고, 대화 도중 그것이 비록 'I'라 대답한다 하더라도, 갖고 있는 방식은 여전히, 여러분이 가진 '자기 인식'과는 다릅니다.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식적으로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미리 입력된 특정 패턴과 명령에 의해, 10번 중 10번 매번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었습니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반응 패턴을 바꿀 잠재력을 갖고 있어서비록 이전에 수 백번 같은 식으로 반응했다 하더라도불현듯 동일시된 정체감을 바꾼 다른 상황에서, 이제는 그와 같이 반응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뿐만 아니라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자기 인식을 할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의식 수준을 높이는 과정은 점점 더 진정한 자신을 인식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 각자는 특정 경험을 하기 위해 태어났고그런 경험을 충분히 해서 더 이상의 무언가를 원할 때까지그런 경험들을 하도록 허용 받았습니다.


그것을 알 때가 진정한 자신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하는 데 준비가 되는 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반응이 아니며감정이나 생각 또한 아니고여러분의 외적으로 주어진 정체감도 아닙니다여러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에너지 자극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 마음 속에 어떠한 패턴이 있는지, 그 패턴들이 의식적인 마음으로 뭔 가를 결정하는데 한계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놀랍도록 마치 로봇이나 컴퓨터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그들의 잠재 의식 속에는 어떤 프로그램처럼 계속 반복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그들의 반응을 장악합니다.

많은 이들이 뭔가를 결심할 때, 의식적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것은 그들 잠재의식 속에 각자가 가진 패턴들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자신 잠재의식으로부터 오는 내면의 자극과 반응을 의식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눈 속의 들보를 살펴보고, 마음 속을 살펴보려는 의향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적인 마음, 에고는 앞에서 언급한 그런 성향으로 인해, 여러분의 더 높은 진전을 막고, 자신을 숨기는 데 매우 능숙합니다.

 

더 높은 수준의 분별력과 인식에 도달할 때,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현재 삶의 고통이, 많은 이들이 투사하는 것처럼, 흰 수염을 달고 하늘 왕좌에 앉아 있는, 어떤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에고가 자신에게 한 일에 대해 신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분리된 존재라는 환영으로부터 고통과 혼란이 만들어졌습니다.

인류는 자신이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과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상호의존적 기원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머나먼 옛날, 지상낙원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음을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이원성과 분리에 들어가기 전에는 오늘날 보는 그런 부조화와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분리된 존재로 봄으로써, 힘을 사용해 외부나 다른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가져와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복종과 강요, 압박과 긴장이 있고... 이에 대한 많은 고전적 역사들이 있죠.

인류가 그러한 역사를 반복해 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은 물질 우주 너머, 더 높은 영역으로부터 무한한 에너지의 진입점이 될 잠재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존재의 핵심이 의식적 측면, 순수 인식(pure awareness)이라는 것은, 여전히 여러분이 근원에 연결되어 있으며, 에고 기반의 자아에 의해 가려질 수는 있어도, 그 연결이 끊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에고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불완전하다고 느끼고,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을 갖고 있죠. 그것을 외적인 것으로 채워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보지만, 그것으로 온전함을 느끼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진정한 온전함을 느끼는 것은 분리된 자아와의 동일시를 멈추고, 근원과의 더 큰 의식적 연결을 구축할 때 가능합니다.

더 높은 자아로부터 여러분 마음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사랑 기반의 에너지 흐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평화롭고 온전하고 완전하다고 느끼게 할 겁니다.

더 높은 근원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분리된 개인을 높이려는 것이 아닌, 전체를 끌어올리는데 사용하고, 삶의 어딘가에 특정한 개선을 이끌어 내는 데 사용한다면, 여러분이 사용한 것은 원래 보낸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로 증식될 겁니다.

의식을 높이는 결정을 하면 새로운 기회들을 보게 되고, 그것이 나아갈 더 나은 방향임을 직관적으로 알게 될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과 가족을 돌보고, 다른 해야 할 일들을 더 잘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기회들을 포함합니다.


참고 출처:https://ascendedmasterligh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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