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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지속 가능한 성장 촉진하기(신청서 1-④, 1-⑥ 질문의 참고)

앤코이 교육재단 2022-06-29 20:55 조회수 아이콘 1055

고통의 근본적 원인인 '양극성'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성장' 촉진하기(신청서 1-④,1-⑤,1-⑥, 2번 질문의 참고) 1-⑤번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하시는 분은 여섯 번째 이해로 바로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인생이 배움의 과정이라면...  이토록 고통스러워야 합니까?"


앤코이가 받은 매우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왜 그 배움이라는 것이 그토록 어렵게 보이는 것일까요?

인생은 자연스러움과 경이,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다는데,

어째서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걸까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는 근본적인 하나의 사실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이 글을 써내려 갑니다.

즉, 여러분 내면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향하는 주의력을 방해하는 쇠사슬이 풀려

외면을 향한 주의력과의 보다 나은 균형점으로 이동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양극단 패턴의 한 단면, 도파민 중독


사람들은 고통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물을 복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넷플렉스나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어떤 이는 밤늦게까지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야식을 먹기도 하며, 밤새 술을 마시는 이도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관심을 돌리기 위해 거의 뭐든지 하려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이 모든 회피의 시도는 결국 고통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사람들은 전에 없던 부와 자유를 누리고 기술적, 혹은 의학적 진보와 함께 살아갑니다만,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과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과거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워 할까요?

열쇠는 바로 인간이 가진 양극단의 패턴을 넘어서는 것에 있습니다. 


양극단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분들을 위해, 먼저 현대인들이 많이 겪고 있는 도파민 의존에 대한 예시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식욕, 성욕, 소유욕, 안전 욕구 등 이런 다양한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쾌감으로 보상을 받는데, 이 쾌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도파민입니다.


도파민은 사실 보상 자체보다는 보상을 얻기 위한 동기부여의 과정에서 더 큰 역할을 합니다.

도파민에 대한 의존성이 적고 지연보상에 더 가치를 둘 때 사람은 여유 있고 합리적이고 안정적이거든요.

반면 도파민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에 의존할 수록 더 충동적이고 분노나 쾌락추구를 원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거에 비해 욕구를 해결하기란 너무나 손쉬워져서 즉각적인 보상에 대한 의존 즉, 중독적 쾌락으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는 SNS나 shorts 영상, 배달 음식이 있고 클릭만 하면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달콤하고 더 매운 음식을 원하고, 막장 드라마일 수록 인기가 좋습니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극적인 자극에 노출되고, 온갖 이유로 도파민에 의존하곤 합니다. 재미를 얻으려고, 어울리려고, 두려움이나 불안, 불면증, 우울감과 고통, 대인관계 기피증을 없애보고자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고통과 쾌락은 이원성의 양극단, 양다리와도 같아서, 마치 저울 혹은 시소의 맞은 편에 놓인 추처럼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도파민이 분비되면 시소는 곧 쾌락쪽으로 기웁니다. 하지만 이 시소는 항상 수평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율 반사적 조정력을 갖고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중독적 쾌락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고통이 따라 옵니다.

심지어 쾌락으로 인해 아래로 기울었던 만큼 고통의 양도 증가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은 평소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중독적 쾌락이 있은 후에는 점점 더 많은 쾌락이 있어야 주어진 고통을 상쇄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쾌락적 즐거움이 별다른 노력 없이 쉽게 충족되는 것이 반복될 수록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감소하고, 쾌락의 기준점은 점점 높아져 일상에서 쾌락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현재는 행복감 대신 결핍감이 지배하게 되고,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라며 끝없이 양극단 사이에서 갈등하다 마침내 모든 의욕이 사라지는 무기력과 공허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많은 성인들이 한번쯤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보상을 얻어야 쾌감을 느끼고, 그 반작용으로 고통으로 기울어진 시소 덕에 아무 일이 없음에도 우울해지고 심리적 압박과 심지어 만성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쾌감이 지나간 자리엔 자기 자신에 대해 좋지 않게 느끼는 느낌으로 채워지고, 사람들은 댓글이나 험담을 통해 그 불쾌한 감정들을 마치 배설하듯 외부로 투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국가적으로, 그리고 선진국일 수록 점점 더 크게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사 이래 최고의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인간의 의식 성숙은 그것을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균형점으로 나아가야 할 차례입니다.

우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 방향일까요?


우리가 왜 그것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일단 그것이 두려움인지, 무료함인지 그 원인을 먼저 찾아야 하죠.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양극단이 늘상 초래하는 이 패턴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 패턴을 벗어나는 것이 정말 진정한 만족과 평화를 주는지 경험을 통해 실험과 교훈의 기회로 삼겠단 의지를 발휘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단 그 패턴을 벗어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면 이제 앞으로 2주간을, 그 쾌락적 중독과 의존을 멈춰보는 시도를 해 봅니다. 처음 2주는 매우 힘들 수 있지만, 분명 다음 2주는 기분이 더 나아지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의학적 사실입니다. 뇌의 보상 경로 회복 기간이 최소 한 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트레스와 도파민 의존은 도파민 부족을 가져옴을, 도파민 부족이 지속되는 것이 전두엽 기능 저하를 비롯해 결국 우울감, 충동적 행동, 집중력 저하, 대인관계의 어려움 같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인식하세요.

이 패턴을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동일시나 판단 없이 지켜보는 연습을 해나가시라고 조언 드립니다.

이것을 '마음챙김' 혹은 '관찰자 위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아래에서 좀 더 언급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적용해 확대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역설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다른 각도로 살펴볼 전환의 기회로 삼아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도파민 보상 기전으로 시작했지만, 고통과 쾌락말고도 수 많은 양극단을 반복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인간에게 있어 고통과 결부된 최대 주제였으니까요.



시야를 확대하여...


이제 기존 틀에서 새로운 시야로 대체하고 확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게시글에서 인간의 의식수준이 매우 광범위하다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가치를 다룰 것이고, 이후 고통의 패턴을 넘어서는 아홉 가지 이해를 언급할 겁니다. 

글이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하지만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과 관련해 자신의 이전 경험을 떠올리고 숙고하는데 연관된 풍부한 소재거리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살펴보면 세계관, 신념 체계 또는 사고체계가 종종 사람들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안전감 혹은 균형감각을 지키기 위해, 각자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키려는 필요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 차이로 전쟁으로 이어졌던 많은 예가 있으며, 그 원인은 단순한 심리적 메커니즘입니다.

인간은 가능한 높은 수준의 안전감을 확립하기 위해 저마다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흔히 가능한 가장 높은 권위나 진리, 궁극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려 애를 씁니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궁극적인 세계관을 가졌다 주장하는 그룹이 최소 두 그룹은 될 것이고,

둘 다 옳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항상 그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되는 딜레마입니다.



한 예로 나치즘을 이야기해 볼까요. 

지금이야 나치즘의 관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 인정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에 절대적이고 광신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빠져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삶을 고통스러워 했고, 그것에 책임을 돌릴 무언가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한 인종, 한 나라에 더 특별하다는 의식을 부여하고, 유토피아를 열망하여 한 인종을 말살하려 했던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신들을 절대적인 지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대의명분으로 가장해 유태인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인류에 이익을 준다고, 혹은 신에 의해서 정당화 된다고 느끼면서 말입니다.

이것을 이끈 자가 누구입니까?

히틀러는 실제 독일 국민이 가진 우월성의 욕구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욕구를 악용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어떠했습니까?

그것을 진짜 애국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애국심을 흉내 낸 것에 기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대중이 독재자를 믿게 되면, 그들은 그 독재자가 지은 잔학행위들의 카르마 일부를 떠맡게 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의식적으로 잘 알지 못합니다.


현재 대체되고 있는 많은 과학적 이론들은 어떤가요.

과거에만 해도 우주 자연법칙의 과학적 발견에 근거한다며 결코 틀릴 수 없는 과학의 권위를 가졌고, 당시에는 절대적 사실로 격상되었던 이론들이 있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뒤집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자연스레 오류였음이 입증되고 있죠.



사람들이 어떠한 것에 대해 그토록 맹목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지구상의 믿음은 많은 경우, 그 사고 방식에 갇혀있는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관점이 절대적이다.' 라는 것이 환영임을 보기 어렵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주는 한계이기도 한데, 언어는 '실재'를 담기에 너무나 한정적이고 우리의 관심과 경험은 '실재'를 이해하기보다는 '오감'과 '생존'에 보다 최적화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물리는 지구가 돈다는 발견에서 시작되었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구는 돌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니, 이보다 경험에 어긋나는 사실이 있나요? 

즉, 삶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것은 인간의 모든 상식과 편견을 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구가 지금 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없듯, 세계는 우리가 이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가 지적했듯이, 많은 사람들은 안전과 보안에 대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고, 많은 이들이 어떤 절대적인 진실을 발견했다고 믿음으로써 그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자기 충족, 인정 욕구, 경험에 의한 프레임을 가지기 때문에, 대부분 어떤 아이디어를 질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합니다.

이런 마음 상태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것만을 찾고 듣고자 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위험하다고 느낍니다.



의식의 단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얻는 새로운 시각

 

"The Path of Higher Awareness" 의하면 인류의 의식 수준이 광범위하게 144단계로까지 나뉜다고 정의합니다.

 

이것을 한번 우리 삶에 적용해 대입 보는 시도로, 많은 이들이 묻는 질문인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비롯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많은 것들이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호 작용이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따라 결정되기에, 의식 수준에 대한 이해는 인간 상호 작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여러분들은 가르침의 배후에 있는 실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언어로 표현된 가르침은 어느 면에서 단지 하나의 안내 표지나 상징에 불과하며, 언어를 초월한 경험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진정한 가르침이 그러하듯,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할 뿐,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위 언급을 염두에 둘 때, "144 Levels of Human Consciousness"는 보기 드물게 꽤 높은 진실 수준을 표현하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 유형의 자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처음에는 생소하고 다소 압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에고의 환영들을 더 쉽게 보도록 하는 도구로서 가치가 큽니다. 


그대가 이런 이해로서 자신이 어떤 특정 유형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마주친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그대는 이상 그러한 사람에게 끌리지 않도록 그대 마음 속에 상응하는 반응 멈추거나,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그 관계를 다루는 법을 배우게 있습니다.

, 의식 수준을 높이면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여러분들 이해를 돕기 위해 하위 단계, 중간 단계, 상위 단계 이렇게 크게 3단계로 나뉘어 설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 언급들은 여러분들 이해를 위한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확장되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먼저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또한 언급 가운데 나오는 '자아'나 '에고'라는 개념에 대하여 아래 링크 글을 함께 읽어보시는 편이 이해에 훨씬 수월하실 겁니다.

에고는 무엇인가요? 

 

*하위 단계(48단계 이하)

-타인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려 함.

-의식의 최저 수준의 예시: 대량 살인자, 사이코패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대의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함. 이에 세계관을 이용하기도

-항상 위협과 긴장을 느끼는 상태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모색함.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함.

-자신 안의 들보를 보려 하지 않음.

- 단계의 어떤 자아는 사람을 완전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나르시스트로 만듦.

-일부 자아는 사람들을 완전히 악하게 만들지는 않음. 단순히 그들 자신에게 집중하고 상위 자아나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없음. 끊임없이 위협을 느끼고 안전하다고 느끼려는 욕구에 의해 움직임. 의식 수준이 낮을 수록 자신을 방어하는데 공격적이

하위 단계에서는 그들이 자란 문화나 가정,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 그들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으로 어려움.

 

*중간 단계(48~96단계)

-이 단계의 에고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것만큼 타인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려 노력하지는 않음.

-중간 단계 이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자신이 자라면서 갖게 감정, 신념, 정체감에서 벗어나는 .

말하자면, 가족과 사회, 집단의 대중 의식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많은 거짓이나 환영들과의 동일시를 그만두고, 위로 자신의 의식을 높여 나가는 과정.

-이 단계까지의 자아는 자기 중심적이기 보다는 자신이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직관적인 감각에 기반함.

-즉, 연결감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개별 존재로 보는 것 둘 다 가지고 있음.

-단계를 올라갈 수록, 자신이 되고 싶은 진정한 자신과 가깝게 알아가, 이 과정에서 일정 부분 개개인의 특성 혹은 개성이 일부  뚜렷해지는 경향이 있음

-이 과정을 통해 높은 근원과의 수직적 연결을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모든 생명과 수평적 연결을 확장함.

- 과정은 종종 자기 개선, 개인적 성장이라고 불리움.

-96단계를 향해 올라갈 수록 직관이 확장됨. (직관은 의식적인 마음이 근원적 의식에 동조하는 능력)

 

*상위 단계(96단계 이상)

-더욱 미묘해진 에고

-이 단계에 도달하면 자신의 의식을 개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주로 집중하던 것에서 이제 모든 이들의 의식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전환됨.

하지만 이것 역시 개인적 성장의 어떤 궁극적인 단계가 아님.

직관을 사용함으로써 여전히 자신의 에고의 구성물로서 세상의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 창조된 자아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

이것은 , 상위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도 자아나 환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

-이 단계 이상부터는 개인적 성장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높은 수준의 경로로서,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의식을 향함.

-지속적인 자기 성찰의 여정(자신을 제한하는 자아를 떠나보내고 주권을 되찾는 과정)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으로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얻음.

-창조력을 증가시켜 자신의 외부 상황이 바뀌게 되고, 자신의 마음을 지배할 있게 되는 것을 목격함.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점차 방해 받게 .

-자신의 삶에 목적이 있다는 느낌을 넓히게 .

-인간적인 감정을 부인하거나 억누르지 않음.

-타인의 자유 의지에 대한 완전한 존중을 실천함.

-이 단계에 처음 들어서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 그들 나은 의식 수준으로 올라가도록 필요한 정신적 냉수 한잔을 건네게

-가장 상위 단계에 가까워질수록 '나'로서는 세상을 구원하거나 변화를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의 반응의 배경 , 집착이나 환영, 느낌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들을 초월해 나감. 간단히 말해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 숙달됨을 성취해 나감

-삶의 방식대로 삶을 수용하면서 모든 것이 응당 정확히 제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평화를 느낌.

-자신에게 내재된 근원적인 인간애가 모든 사람의 내면에 똑같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 그리고 이후 사회로부터 멀어져,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오도록 가르침을 제공하기도 .

-자신의 의식 상태를 생명 자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 크리슈나, 고타마 붓다... 와 같은 많은 영적 스승들이 있음.

-세상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정체감을 넘어섬. 이는 외면의 어떤 결과나 행위를 이루는 것과는 상관없는 내면의 작업임. 지상의 조건과 관련하여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을 멈춤으로서 졸업 자격을 얻게 됨.

-144단계를 넘어서는 것이 이 인생 학교의 졸업



이렇듯 삶을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람은 매우 광범위한 의식의 영역을 가졌습니다. 


하위 단계의 일부 존재들은 자신을 특별한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느끼지만, 인도주의적 관념도 생명에 대한 어떠한 존중심도 없이, 인간을 그저 도구로만 보기도 합니다. 


한편 참 스승들은 의식 성장에 대한 참조틀, "인간의 의식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과 "한 사람이 한 일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그들은 의식의 144단계에 가까워지고 그마저 넘어섬으로써 실재를 발견했습니다.

비록 인류에게 주어진 이 가르침과 본보기들이 사람들의 무지와 에고에 의해 현재 많이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가르침들의 뿌리에 여전히 그 정수와 통찰은 남아 있습니다. 


의식성장과 관련해 지구 역사 이래, 참으로 수많은 가르침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많이 보급된 성경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고, 심지어 베다나 베단타(Advaita Vedanta)의 일부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적 가르침을 살펴보고 그 본질을 추려낼 때, 이 모든 가르침들이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모두 한 가지를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과 여정의 목표, 더 높은 마음의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목적은, 여러분이 그 상태를 천국이나 깨달음 또는 열반 그 무엇이라 부르든, 오직 한 가지 여러분의 마음 상태가 지구상의 물리적인 조건을 포함하여 외부의 어떤 조건에도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온 모든 참된 영적 가르침의 본질적인 메시지이지만,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떤 영성 가르침도 궁극적인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


그러므로 참 스승들께서 의식 성장과 관련된 진정한 가르침을 여러분들에게 주는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현재 의식 수준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도록 도울 무언가를 전해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현재 의식 수준에 적합한 말로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르침은 그들을 도울 수 없으므로, 그들의 의식 수준에 맞는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이 궁극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문제를 발생시켰을 때와 똑같은 의식수준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각종 보여지는 경제와 정치 상황들 속에서,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미래에 덜 낙관적이곤 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운 시기에 평화로울 수 없다는 느낌에 갇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계속 갇혀있는 사람이 앤코이가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시대를 이끌 선구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반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우리가 부정적인 것을 인식함으로써 주의를 기울인다면 의식으로 그것을 확대하기 때문에 단순히 긍정적인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선의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면을 부정함으로써 인류를 여전히 무지에 남게 합니다.

무지는 단순히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실재'라고 인식하고 더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무지입니다.


문제를 발생시켰을 때와 똑같은 의식수준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폐를 감염시키는 세균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폐렴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계속 무지에 남게 하는 방식으로는 인간 심리를 진정 치유하기란 어려우며, 인간이 본래 가진 힘과 삶의 법칙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습니다.


앤코이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이원성을 넘어섬으로, 참 분별력에 근거한 근원의 참된 힘에 정렬됨으로, 여러분들이 더 높은 의식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첫 번째 이해: 양극단 넘어서기 "중도"


이 가르침은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좌절되지 않는 경험의 작동 방식을 알려 주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이 가르침이 단순히 특정 종교에만 국한된다는 판단은, 이것을 삶에 제대로 적용해보고 난 뒤 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중도(Middle Way)는 이원적인 양극의 어느 측면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고통으로 경험하는 이유가 특정한 의식 상태, 환영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하다, 저것은 악이다',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

이 의식 상태는 이런 이원적인 반대극에 의해서 지배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양극단으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죠. 

많은 분들이 다이어트를 시작단계에서 극단적 금식을 시도하다가, 이후 정신줄을 놓고 폭식을 하게 되는 경우들을 보셨을 겁니다. 극단은 극단을 불러일으키고, 자책과 포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쳇바퀴 돌듯 그것을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중도의 가르침에서는 의식적인 균형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두 가지 이원적 극단 사이의 중간점(mid-point)이나 회색지대를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평화나 사랑 등 선하고 좋다고 여겨지는 것에 인간이 부여하고 있는 어떤 조건적 개념들이 있고, 그 반대 개념으로서의 쌍, 비평화나 반평화 또는 반사랑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둘 다를 넘어서는(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인데, 이 점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중도의 중은 둘이 아니라고 보는 눈( 볼 관)입니다.

그것은 이원성을 극복해서 어느 극단도 자신을 반응으로 이끌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부 상황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신 내부의 양극단의 갈등에 휩싸일 때, 그것을 피하지 말고 다만 그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 그 시작입니다.

휘말리지 말고 반응하지 않으면서 관찰자 혹은 중립적인 시선으로 세상의 양극단을 바라보는 지점입니다.


마음에는 안과 밖이 둘이 아닙니다. 보는 그 놈(거짓 자아, 에고의 내용물)이 보여지는 대상입니다.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시선을 안으로 돌릴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이 알아차려집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생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현상, 마치 파도와도 같습니다. 

어떤 생각에 집착하여 붙잡으면 그것이 괴로움이 되는 것이지, 밖에 실재적인 괴로움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 진실이 아닙니다. 외부로부터 받아들여 본인 뜻대로 해석하고 간직한 분별을 붙잡고 괴로워합니다. 생각이 '나'(에고)를 만들고, 생각과 괴로움 또한 마음에 담긴 내용물들(에고)이 만듭니다.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진정 적용해 본다면 삶에서 균형으로 나아가는 유용하고 검증된 방법이기도 하고, 실제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보편적 이해를 얻음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도 있다고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주목해서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고통의 원인은 여러분 내면에서 나오는 태도이고 반응이지, 외부의 요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대부분의 것들을 대입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여러 확장이 가능하지만, 일단 신청서 작성에 도움이 될만한 이해를 국소적으로 일부 언급해 본다면, 싫어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눠, "우리 대 그들"의 사고방식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주제는 우리에게 고통을 유발시키는 반응과 영향을 포함하여 우리가 여러분 자신의 상황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영향을 미치기에 중요합니다.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사실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물질주의든, 정치적 혹은 종교적 접근이든, 무언가 잘못되었다 여겨지면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정당화했던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교전쟁, 마녀사냥, 계급사회, 물질주의, 정치나 성별의 양극화 등을 한번 살펴보세요.

사람들이 균형에 대한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양한 극단과 그러한 상황으로 끌려가는 예가 이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양극단과 고통을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이는 폭력적인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음 두 가지 관점으로 치우치곤 했었습니다.

상대편을 처단해야 할 '악'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무의식적 분노나 두려움을 가지고 초점을 맞추거나, (위에서 나치즘의 예를 보셨죠.)

그것을 강화하거나 엮이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겠다고 결정해버렸었죠.

또한 일부 사람들의 멘탈 박스는 그들 자신의 일과 가족에만 국한되어 그 이상을 거의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양 쪽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전자는 실제 분열과 고통을 강화시켜 오히려 힘을 실어 줍니다.

후자 역시, 무시했던 행동은 분열과 고통을 없애는 데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진짜 원인은 상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앤코이는 무시하라고도, 맞서 싸우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상대편과 내편을 나누는 것마저 실은 이원성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민주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집단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폭력은 결코 정당한 수단이 될 수도 없고 오히려 성장을 지연시킬 뿐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 바로 '국민들이 이원성을 넘어서 균형과 분별력을 갖는 것'이라 봅니다. 

여기에는 폭력을 피하고 서로 다른 그룹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에 동조하지 않는 것도 포함됩니다. 


악과 고통을 넘어서는 방법은 '이해'이고, 그 첫 번째 열쇠가 바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해'는 어떤 문제에 대한 힘을 실어 스스로 자멸적인 나선에 말려들도록 하는 그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끔 해줍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서로 양극단으로 분열되도록 하는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그저 무시해서는 이런 이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이해, 의식이 곧 창조를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이 단순히 불완전하고 일시적임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미움과 분노 속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에너지를 공급 받아 남아있는 많은 결함들이 있습니다. 


위에 먼저 언급된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신념들을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큰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의식은 곧 창조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삶에 어떤 고정된 원리로서 질병, 재난, 고통, 죽음 등 오늘날의 지구의 많은 현상들을 보고 있는, 가장 깊은 측면의 이유 중 한 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기정사실로서 마치 당연한 듯, 그리고 변경 불가능한 것인 것 마냥 받아 들여지고 있는 신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알고 보면 출처를 되짚기에는 너무나 오래되어서 어쩌면 한번도 제대로 의문을 제시해보지 않은 채 그저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여 왔던 것은 아닐런지요.

  

만약 이것을 놓치고 오직 자신이 믿는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거나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면, 사람은 관용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놓치게 됩니다

이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종교, 정치, 국가, 성별 등 여러 집단 간에 수많은 갈등과 분쟁, 전쟁입니다.

 

인류는 그간 의식을 고통의 원인인 '외부'로 향해야 한다고 여겨옴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고 수많은 노력과 통제로서 투쟁 의식과 갈등을 믿고 받아 들였습니다.

 

그것은 이원적인 마음 상태에서 끊임없이 판단하는 내적인 마음의 상태,  고통의 상태에 끊임없이 머무르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이원적 고통의 상태 너머로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건강을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측면으로 어느 정도 만족하는 차원에서 한걸음 더 도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인류에게 걸맞는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심리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날에는 사람들의 심리와 트라우마를 치유하도록 돕고, 인간에게 그리스도 의식을 통한 더 높은 의식의 잠재력이 있음을 긍정할 필요가 있으며, 사람들이 더 큰 직관을 개발하여 중립적인 마음 상태로 모든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지 않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 이해, 삶의 기본 최상위 법칙- 자유의지의 법칙(the Law of Free will)



출처: 구글 이미지


의식은 자기 개념과 결합되어 있고, 자기감(sense of self, 일종의 개인적 자기정체감을 말함.)이 한정되어 있을수록, 경험이라는 매개변수는 더욱 작아집니다.

그리고 자아감을 확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유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류는 언제든 더 나은, 더 높은 경험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졌습니다.

'자유의지의 법칙'은 '성장' 다음으로, 인생 학교에 존재하는 최상위 법칙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성장을 위하여 '완전한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신의 완전하고 크신 사랑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 타락한 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타락한 의식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증명하고자 함이고, 어떤 면에서는 자유의지의 잠재적 결과였습니다.

만약 누군가 신의 계획에 반항할 수 없도록 통제 당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유의지가 아니죠.

이것은 신에 반대되는 개념의 악마가 아닙니다. 

신은 이원성을 초월해 있죠.


그 타락한 의식에 젖은 세력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사실상 인류의 행복과 발전이나 생명 존중에는 완전히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죽음의 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이 살인이나 전쟁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강렬한 지적 논쟁과 갈등으로 비롯된 혼란과 볼텍스(vortex)를 지속적으로 일으키고 퍼뜨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왔나요?


세상에 존재하는 조건을 정의하고 부여하여 수많은 이원적 기준들을 만들고, 모든 이들이 그것에 따라야만 한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가르치고 주입해 왔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신조차도 자신들이 정의한 표준에 따라야 한다고 투사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고, 사람들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밀어 붙입니다.

만약 오랜 전쟁이나 갈등 혹은 양극단에 지친 사람들이 더 적은 평화라도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시기가 오면, 분쟁 이후에 이루어질 평화가 어떠해야 하는지 조건을 정의함으로써, 또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있다며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내고, 더 큰 통제권과 지배력을 확장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그들의 정교하고 오래된 수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비교하는 마음의 틀 안에 가두어 우월함과 시기심을 일으키는 이원성 의식 안에 스스로 갇혀 있고, 자신만을 우월한 존재로 격상시키기 위하여 인류를 이용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아주 오래 전부터 교묘하고도 적극적으로 의도적인 속임수를 이용하여 인류에게 타락한 의식을 퍼뜨렸고, 이것은 현재에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정교하여 인류는 본인들이 속아 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실재인 마냥 익숙해져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추종하고 모방하기까지 합니다.


많은 이들이 특정한 정신적 사고 방식, 감정적이고 반동적인 특정 패턴들에 갇혀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현재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것은 자유의지의 진정한 발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언급 드리는 이유는, 그들은 여러분의 자유의지에 반하여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속이지 않고는 방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에고의 선형적이고 지적인 마음으로는 이원성이라는 환상과 거짓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때문에 지적인 마음 너머의 것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직관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에고를 벗어나 직관에 기반한 분별력'을 기르시라고 제안드리는 이유이며, 여러분이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분열과 고통이라는 제한된 선택들을 하고 있는 원인을 제대로 인지함으로써 타락한 의식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인류를 돕기 위하여 신께서는 참 스승들을 끊임없이 보내시지만, 육화 당시 그가 참 스승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그 가르침마저도 많은 경우 외면받거나 이원적으로 왜곡하여 해석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의식을 가진 이들이 최선을 다해 이룬 잠정적 성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선과 악, 좋고 나쁨, 이러한 이원성이라는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진 표면적 감각에 매우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참 스승이라면 여러분의 환상을 충족시키지 않을 뿐더러, 여러분들이 이원성을 초월하도록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이원적 필터의 기대와 기준에 맞는 스승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스승에 닿지 못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실로 좁아서가 아니라, 진정한 이해에 열려 있는 사람들이 적을 뿐입니다.


참 스승들 역시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반해서 여러분들을 도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 두세요. 

인간의 문제나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참 스승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돕기 위한 최선의 의도와 지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변화하기를 원치 않고 자신들의 고통을 극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이나 그 밖의 뭐가 됐든 포기하려 하지 않고,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삶에 불평은 하지만, 실제 불행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도, 귀 기울이길 원치 않습니다.


비록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그것 또한 엄밀히 말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택'이므로 이러한 양상은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고통은 사람들의 선택과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심리적 조건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갑니다.



네 번째 이해, 세상이 혼돈임을 포용하고 '관조'하길 택합니다.



타락한 의식의 노력들이 마치 겉보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 같아 보이지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사실 한 가지는, 그들의 통제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통제하는 사고방식이나 타락한 사고방식, 이원성 의식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역학 제 2법칙에 귀속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반대되는 극성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긴장이 생겨나 결국은 서로를 파괴하게 됩니다.

또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로 인해 그들이 만들어 놓은 통제 시스템이 와해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원성 의식에 의해 더 큰 힘을 가질 수록, 그 힘에 반대되는 것이 더 많이 만들어져 결국 스스로 붕괴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죠. 이런 것은 진정한 성취가 아닙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원성 의식과 타락한 의식으로 궁극적인 최상의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은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대중이 창조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창조성과 직관을 되찾기 위한 결정적인 열쇠는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먼저 에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동일시를 그만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에고는 여러분 안에 특정 반응 패턴들에 계속 갇혀 남아있게 하고, 이것이 아주 오랜 세월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관조(contemplation:대상을 논리적 사변에 의하지 않고 직접 구체적으로 파악함. 통찰 또는 관찰과 어느 정도 그 뜻이 일맥상통함.-나무위키)에 의해서만 동일시는 무너집니다.


2500년 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2000년 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공통점, 외부의 문제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는 가르침, 이것은 모든 진정한 영적 가르침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실제 믿을만한 것은 무엇인가요?

삶이란, 자기-의식적인 존재들의 의식 성장을 위한 발판, 무대입니다.

이 자기 의식하는 존재들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유 의지로 실험하고, 선택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면서 의식이 성장합니다.

더 많이 자유로울 수록, 그것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자유 의지는 우리가 부여 받은 삶의 최상위 법칙이고, 그렇기에 그 누구도 심지어 신 자신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자유의지로 인해, 세상은 사실 혼돈입니다.

지난 몇 년동안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겪어왔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각종 경제 상황들이 이어졌고, 그것은 우리의 평형 감각을 흐트려뜨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앤코이는 혼돈이 지닌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혼돈은 단지 나쁜 것이 아니라, 실제 삶과 창조성의 기초입니다.

그것은 상호의존적 기원에 따른 새로운 관점과 이해의 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돈을 꼭 단편적으로 고통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간 고착되 성장을 저해시켜 왔던 것들을 한번 되돌아보고 혼돈을 이용해 새롭고 더 높은 상태를 창조해 보았으면 합니다.

통제나 무력으로 평화와 질서를 만들겠다는 사고 대신, 혼돈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더 건설적인 변화의 잠재력으로 바라보고, 이전에 한번도 생각지 못한 것을 여러분의 직관을 활용해 가져오시길 권고드립니다.


그럴 때, 우리를 흔드는 상황들은 실제 그간 보지 못한 접근을 발견하고 성장할 '기회'가 됩니다.

우리 안의 유연성에 닿을 수 있다면, 실상 그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으며, 쉽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해, 음모론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기


 4기 신청서 질문 주제 중 하나가 영화 <매트릭스>이기도 했죠.

'사라지는 경계'를 놀라운 방식으로 담아낸 이 영화를 관람하다 보니, (영화 흥행적 요소와 화려한 화면 구성을 위한 연출이거나, 혹은 우리 내면의 이원적 요소를 다룬 셈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물론 있긴 합니다만,) 미묘하게 다음과 같은 음모론들의 세계관과 양극성의 요소가 그 안에 들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모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비밀스런 음모론이 존재하고,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정부와 언론, 기업들이 이 음모론의 일부이거나 그것에 통제되고 있고, 누군가 여러분을 노리고 있다.

-유일하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네오 같은 구원자가 와서 좋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나쁜 이들을 파괴해야 한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있고, 희생양을 정의하는 이론에 끌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더 잘 안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음모론적 세계관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좌절과 분노만 더 키우는 거 같습니다.


우리는 일부 뉴에이지 가르침을 통한 부정적 예언들도 종종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미래에 어떤 극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거나 외계인들의 간섭, 종말이나 파괴와 같은 메시지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신봉해 버린다면, 그러한 위험들이 존재하는 한, 뭔가 계속 경계하며 살아가야 할 것 같고 삶에 완전히 평화로울 수 없다는 마음에 자칫 휘말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디 그러한 것을 알아차리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앤코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며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고 느낍니다.

세계가 민주주의, 자유와 번영으로 이어지는 성장 곡선에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어찌 보면 현실적인 낙관론자들이고, 그것이 우리 자신과 여러분을 돕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또한 우리가 바라보는 비전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이해,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한가요?


위에서 언급 드렸듯,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는 소수인들에게 인류를 통솔할 직위나 지위가 주어지는 것은 인류의 건설적인 성장 발전을 크게 저해합니다.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개인적인 결정과 책임을 포기하려 하고, 그 소수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강요하는 대신에, 그들은 사람들을 교묘히 속이는 방법을 택합니다.

독재는 힘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 죽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는 힘이 아닌 전체 인구가 투표하는 것을 확립함으로써 통제를 제한하니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속임수를 꿰뚫어 볼 충분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 참된 힘(power)이 아닌 위력(force), 즉 거짓 힘을 따르게 될 때에만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임수에 대한 한 가지 방어는 사람들이 열린 마음을 갖고,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헌신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생명에 대한 존중 없이, 자신들만이 특별하다고 보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정부에서 어떤 직위도, 또한 인류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떠한 지위도 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뉴스를 읽으며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4년마다 투표소에 가서 정부에 대해 투표를 하면서 민주 시민의 책임을 다했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그냥 앉아서 정부에 대해 불평하고 투덜대지만, 막상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왜 하지 않는지, 그들 겉모습 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부가 헌법상 해야 하는 일과 실제로 한 일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려는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민주 정부는 편안하게 앉아서 시민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정부 형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로 매우 많은 관심과 책임이 요구됩니다.


평상시 자신의 욕망을 피력해본 경험을 거의 해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민주주의 삶을 실천하기란 어쩌면 상당히 어색합니다. 

사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가정 안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보고 배워본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특히 조부모 세대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기호대로 많은 것이 결정되었었죠.

모든 가정이 그러한 것은 아니나, 그것을 보고 자란 부모 세대 역시 양육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집들은 대부분 조용하고 겉보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이나, 실은 가장의 권위를 의식해  의사 표현이 자유롭지 못했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억압과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더랬습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삶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관철시키도록 허용 받아 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 한 가지, 결정하기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책임지기를 두려워하여, 누군가 대신 결정해 주길 바라는 심리적 측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이 넘어서야 할 권위주의 잔재임을, 이제는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때가 온 거 같습니다.


대중들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개인적인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성숙했고, 특정 안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없었던 과거에 비해, 현재는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수단이 있어서 더 이상 하향식(top-down)형태의 정부나 의사 결정 형태가 필요 없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고 설령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여전히 소수 엘리트가 대신해 결정을 내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과 발전, 이해로 이어질 수 있으며,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하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여러분은 이미 많은 경험과 잠재성을 지녔습니다.

정부측에서 나서서 나라가 운영되는 방식에 대해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국민들을 주된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계몽시킨다면 이것은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부모님들 또한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민주주의 연습을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갈등을 감수하고서라도 자녀가 자기 생각대로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지지해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적인 조직은 가장 강하고 창의적인 조직이라는 점에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죠.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힘은 그 바탕에 있는 원리에서 일어납니다.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일정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대한 권리가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민주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되찾고, 시민이 함께 조율하고 발언하며 소통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양극화와 분열을 넘어서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 봅니다.



일곱 번째 이해, 우리는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앤코이가 지향하는 참나의 의식은 다양성을 척결하고 동일성을 창조함으로써 조화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해 줌으로써 조화를 이룹니다.

따라서 차이점으로부터 위협 받지 않고 서로의 개성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출처: 구글이미지


앤코이는 인류 중 단 10%만이라도, 자신의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고 이원성을 넘어서기 시작할 때 전체에 발휘되는 영향력과 잠재력은 상상 그 이상이 될 것이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앤코이는 더 많은 분들이 동등한 기회와 가치, 평등을 확립할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되 과거에 반복했던 것처럼 또다시 더 큰 대의명분 하에 국민의 자유를 빼앗는 방식이 아닌자유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새로운 이해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진정한 자유란 분리된 자아감을 넘어서서 여러분이 현재 동일시하는 그것보다 더 이상(more)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틀을 넘어 현재의 이해를 뛰어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모든 이들 안에 개개인의 가능성을 실현할 가치가 있다는 면에서그리고 오직모두를 높이는 일을 할 때 진정으로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면에서 민주주의는 탄생했습니다.

 

앤코이는 현재 상황에 대한 보다 나은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이 최면에서 깨어나 다시 그 영향력과 권능을 되찾는 것'이라 여깁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상황들이 그들 자신의 의식 상태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것을 기꺼이 보았으면 합니다. 

 

그저 뒤에 물러나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정부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에내 정부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보고내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국민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덟 번째, '사랑의 강력한 힘'과 '인과응보'를 기억할 것


지금부터 잠시, 왜 큰 스승들께서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 하시는지 전해드리려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온누리에 가장 강력한 힘이요, 그것은 강철을 자화할 때 쓰는 그 강력한 전자석보다 더 강한 전자석입니다. 

강철을 자화하면, 분자가 모두 남극과 북극을 향해 가지런히 배열되고, 

원자 자체가 조화되면서 그 강철 덩이는 하나의 자석으로 바뀝니다.


그와 같이 사랑 또한, 영혼과 육체의 에너지와 원자를 자화하여 선한 것들(good things)을 강력하게 끌어당겨 새로운 사랑을 표현하게 합니다.

원자와 원자 사이의 조화는 생명의 기본적 기능인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의 바탕에 있는 전자력이요, 그 원리와 법칙입니다.

사랑의 원리, 그것이 온누리에 일체 '있음(being, 존재)'을 창조해낸 근본 힘입니다.

그것은 절대자 자체는 아니지만, 우주에 있어서 절대자의 운동입니다.

이 운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질료의 원자들을 변화시켜 눈에 보이는 온갖 형태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 때에 미묘한 매체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속에서 창조의 청사진이 만들어지고, 절대자의 운동인 사랑이 전자와 원자를 바꾸고 맞추어 모양을 띄게 합니다.

전자력이 작용하고 있는 사이에는 항상 이 에너지가 모든 모양이 있는 것들의 바탕이 됩니다.

이 원리와 법칙은 온 우주에 걸쳐 한결같습니다.

창조주는 '하나'이고 피조물 역시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그대로 하나이며 결코 따로가 아닙니다.

에너지는 창조자의 상념의 매체이고, 가장 강하게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그것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을 주는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받으며,

그 반대의 것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씨 뿌린 것을 그대로 거둡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면, 우리 자신이 종종 그것을 받게 되지요.

물론 사랑이 반드시 그것을 준 사람에게서 꼭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친절이, 생각지도 않은 다른 루트로, 그것이 더욱더 커져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



마지막 아홉 번째, 우리 시대를 정의할 방향성


감사하게도 어느 시대나, 사회 구조의 본질적인 왜곡을 인식하여 사회를 보다 나은 균형과 성장의 방향으로 이끄는 선한 영향력의 본보기가 되었던 이들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보편성에 입각해 더 높은 시각을 찾는 인류의 움직임이 더해져, 시대는 그렇게 서서히 발전을 이루어왔죠.


이 세대가 과거와 다른 점은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국경, 인종, 성별의 차원을 뛰어넘는 범지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지출처: 구글 이미지



시대가 전환되면서 디지털 미디어, 소셜 네트워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함께 공유되고 있고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교육 받고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이것은 임계 수치의 사람들이 자유를 행사하여 주류 언론이 제공하는 환영과 거짓말을 넘어서고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스로 공부할 때서서히... 우리가 양극화 현상을 만든 이원성 너머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합니다.


현 정부를 포함해 미래 정부와 기업들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만들어내는 성공적인 방법은 기존의 복잡한 금융 시스템 속에서 시장 상황을 통제하고 독점할 것이 아니라바로 국민과 피고용자들이 더 큰 성장과 풍요를 누리도록 모든 생명을 들어 올리는 원칙의 관리자이자 리더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미래 자유 경제의 어떤 시점에서는 고객에게 봉사하는 기업만이 계속해서 대규모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미래 시대 정부 차원에서는 언론이나 기업, 사회, 심리 모든 분야에서 기존 전통적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생각의 틀을 넘어서는 더 큰 실재가 있다는 비전을 가진 사람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이 모든 기회들은, 국민들이 이원성 의식을 넘어서는 것으로가능하고그것이 이 시대를 주도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본보기 보이고 우리 시대를 정의할 방향성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lovepick



참고 출처:

https://higherawarenesspsychology.com/

https://www.agehigherawaren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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