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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분별력 끌어올리기 (신청서 1-⑤의 참고)

앤코이 교육재단 2022-06-30 14:17 조회수 아이콘 591

분별력 끌어올리기 (신청서 1- 참고)


의식을 성장시키는 여정의 가치는 스스로를 진정한 자신, 그리고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일어나는 고통의 몰입단계에서 깨어나이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전체적 인식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삶의 더 큰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전체적 인식이 높아진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 종교나 조직과 관련이 있거나, 어떤 뉴에이지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완전히 보편적이며, 본질적인 인간성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직관적 능력을 예리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시작단계에서는, 스스로 충분한 직관과 분별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과정이고, 길의 일부분입니다.


분별력을 끌어올리는 것에는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과 '말의 진동을 분별하여 느끼는 능력'이 있겠습니다만, 우선 말의 진동을 분별하여 느끼는 것을 다루고 이어서 '더 나은 선택'에 대한 이해도 약간 다뤄보려 합니다.


거짓뉴스를 비롯해 온갖 속임수와 사기, 거짓말이 난무하는 요즘과 같은 정보와 관계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읽을 것도 너무 많고 보고 거를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또한 갈수록 교묘해지는 현혹함 속에서, 혹은 자신 안의 '에고'의 목소리와 '참나'의 목소리가 충돌할 때, 우리는 분별력을 필요로 하는 많은 순간들을 대하게 되는데요.



이미지 출처: 박성민 / 갓피플 만화 _ 하땅이 이야기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말의 진동을 구분함으로써 자신의 분별력을 좀 더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여기에 우리가 특별히 알아차려야 할 10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거짓의 특성 알기


먼저, 거짓 기사나 거짓 댓글들이 갖고 있는 특성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요.

그것에는 뭔가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요약해버리고 싶은 성향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화는 이 복잡한 세상을 쉽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상대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균형을 잃은 지나친 단순화는,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들이 너무 많아지기에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가 잘못 이해하게 만들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이슈가 단순화될 때, 한 쪽이 그것을 초월하려 하지 않는 한, 두 집단 혹은 사람들 사이에 논쟁과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오해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즉, 단순화는 논쟁을 야기시키기 쉽다는 것입니다.

오해나 해석의 여지로 인해, 우리는 옳고 그들은 틀리다는 대립이 생깁니다. 

실제 이슈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패턴을 끊어낼, 어떤 가르침이나 설교 못지않은 깊이를 가진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겐샤이'.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온 이 단어에는 '어느 누구든 스스로를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끼도록 대해선 안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입니다.


어떤 이슈에 대해 아주 단순한 용어로 묘사하고, 옳고 그름에 따라 정의해버리는 단순화는 흔히 상대를 작은 존재로 깎아 내리는 것을 동반합니다. 그러한 것을 접하게 된다면, 단순히 이 말을 기억하도록 하세요.

"겐샤이"



두 번째, 결과적으로 이익을 얻는 자가 누구인가를 보면 좀 더 쉽다.


관심을 조금만 가져보면 그것을 통해 결국 이익을 얻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이나, 맨 밑의 영상에서 트럼프에 대해 보여주는 것처럼, 대선과 같이 자신만의 지지세력을 늘리려 하는 것도 포함되겠습니다만, 대개 그 중심에는 자신 에고의 만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각성하고 진정 돕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어느 한 편을 깎아내림으로써 자기 자신이 옳아야 한다고, 그리고 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다 알지 못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에고의 측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열등감의 대표적인 특징이고, 자신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심리적 목적이 이면에 들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에고는 어떤 서사적인 사고방식과 흑백논리 생각에 영향을 받아, 옳고 그름으로 상대를 조종하려 듭니다.


이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바는, 스스로가 에고의 욕망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집착 때문에 함정에 빠지죠.

결국 스스로가 놓은 덫에 걸려들기 마련입니다.



세 번째, '믿음'보단 신뢰를 통한 '체험'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하고 싶어 합니다. 이미 알려진 것은 진실 또는 선이고, 그간 알려졌거나 받아들여진 것과 다른 것들은 거짓 또는 악이라고 가치판단을 내려 버립니다. 


그래서 거짓을 식별하는 것은 많은 경우,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진실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온화하고 진실해보이는 교묘한 거짓말과, 

세상의 규범과는 너무 달라서 처음에는 진리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실재 사이의 아주 미세한 차이를 식별해야 하는 훨씬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 마음의 성향에 에고의 '편중성'과 '논리성', 그리고 '의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대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직관'과 '중립적인 과학적 관찰'을 결합시킬 때 그 복잡한 문제가 한결 가벼워집니다.

에고가 가진 편중성,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성향에 대해서는 다른 게시글에서 자세히 다룬 적 있습니다. 

"인생이 배움의 과정이라면, 왜 이토록 고통스러워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선형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논리에 대해서도 언급했었구요.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전환하기 위한 이해

마음이 하는 또 다른 일은 의심입니다. 하나의 질문에 답을 주면 열 개의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마음입니다.

시작 단계에서 의심은 거짓을 드러내고, 논리성 또한 성장의 어느 단계까지는 여러분을 돕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 상황에 진정 도움이 되는 이해나 성장으로 이끄는 생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모든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을 하면 여러분의 논리적인 마음은 더 강해질 겁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앎, 영감과 직관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진정 도울 방법은 논리성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대답이 아니라, 논리성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참 스승의 말이 왜 모순이 많고 비논리적인지 위의 말과 연관 짓는다면 좀 이해가 가실 겁니다.

궁극적 진리는 오직 직관적인 경험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고 말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진리를 아는 자는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으로 말합니다.

삶과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명확하지 않고 신비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많은 경우 이것을 어려워하기에, 진실만을 담기 보단, 진실 사이사이 사실 같은 거짓을 끼워 넣어 논리성이라는 공백을 메우려 듭니다.


에고가 가진 편중성과 논리성, 의심의 영향으로, 많은 경우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는 다르게 '믿는대로 보여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세요.

믿음은 많은 경우 배신을 합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어떤 것을 상대에게 의존했기 때문이죠.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평생을 낭비하고 후회하곤 합니다. 


세상 종교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 종교 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믿음이 다르고 기독교의 믿음이 다릅니다. 믿음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의식성장은 믿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것이나 쉽게 믿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는 삶의 변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식성장은 여러분을 얽매이게 했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와 균형으로 나아가는 삶의 변형이고, 삶의 변형은 인생관, 생활 패턴, 마음과 정신 등이 모두 산산 조각나고 그런 다음 새로운 것이 태어나, 그 새로운 무언가를 통해 진리와 만나는 작업입니다.


과학은 말합니다. "믿지 마라. 할 수 있는 데까지 의심하라. 불신하지도 말아라. 불신도 믿음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을 수도 있고, 무신론을 신봉할 수도 있습니다. 광신적으로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광신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모두 믿음의 세계이지만 그 믿음은 과학의 세계가 아닙니다.

과학은 믿음에 구애받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작업이죠.


그러니 다시 말씀드리자면, 믿음보다는 체험의 길을 가시되, 한 가지 유의점은,  현 과학계가 물질주의의 영향을 받아 '논리성'과 '의심'의 한계를 가졌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보다 중립적인 과학적 관찰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마음은 닫힌 마음입니다. 의식 성장의 가능성이 닫힙니다. 너무 논리적이다 보면 마음이 닫혀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기 어렵습니다. 



"신청서에 여러분의 체험을 담으세요."


인간이 직접 알면 모든 거짓은 그냥 떨어져 나갈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직접 인식을 얻는 법도, 이해를 바탕으로 성장에 도움이 되는 생각을 얻는 법도 잘 모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아는 자의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타를 제시합니다.


붓다가 말씀하셨고 예수도 말씀을 남기셨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모르고 그들의 체험을 모릅니다. 그저 신뢰할 뿐이지만 이 신뢰에 뛰어드는 것으로, 논리가 결코 추론해 내지 못하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신뢰는 가설적이고, 가설이란 일을 시작해서 진행시키기 위한 하나의 토대라는 말씀입니다.

즉, 가설은 방향설정인 것입니다. 방향이 설정되면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 실험해야 하는 것이죠.

실험이 입증되면 그에게 처음에는 가설이었던 것이 이제 사실적 체험이 됩니다.


삶에는 딱 하나의 실수가 있습니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일이 그것입니다.

무서워서, 이 길을 가다보면 뭔가 시간 낭비이거나 잘못될 것이라는 걱정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이것이 삶의 유일한 실수입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성장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앤코이는 여러분들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이 실험을 요구하듯, 우리는 신청서에 여러분들의 체험을 담아내시라고 말합니다.

실험이 바깥세상에서 하는 것이라면, 체험은 내면세계에서 하는 작업 즉, 내면의 실험입니다.

일단 체험에 뿌리를 내리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닫힌 마음이 아닌, 직관을 통할 때, 실험과 체험은 방향이 다르지만 결국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가 말하는 대로 그저 믿어버릴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 분별하는 연습을 하시는 것이 좋으며, 체험의 어느 단계에서도 궁극적인 것은 없다는 것 또한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왜 그것을 믿었나요? 그것을 받아들인 그대 안의 심리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대의 분별력을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기회'였습니다.

항상 '더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방향성이 그대의 분별력을 더 높일 겁니다. 


"단순히 들었다고 해서 무엇도 믿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소문을 낸다고 해서, 종교 서적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대로 믿지 말라. 당신의 선생들과 장로들의 권위로 그저 믿지 말라. 여러 세대에 거쳐 전해 내려온 전통을 믿지 말라. 그러나 관찰하고 분석한 후에 어떤 것이 이성과 일치하고 모든 사람의 선과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생활하라." -고타마 싯다르타 


네 번째, 가슴 중심에서 진동 읽기 연습


어떤 의미에서 사기꾼의 복면을 벗기는 유일한 방법은 진동을 읽는 것입니다.

진동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진정한 본성에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특정 스펙트럼 안에서, 가시광선이라 불리는 진동을 감지하도록 설계된 도구이듯,

직관은 물질 스펙트럼을 벗어난 주파수를 감지하도록 고안된 것으로써, 

모든 사람이 이용 가능하고, 길러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머리에서 가슴 중심으로 이동되어야 합니다. 

단위로 쪼개어 외면적 모습으로, 선형적 마음으로만 분석하던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 전체의 흐름에 집중해 보세요.

진동을 비교하여 가슴에 울려퍼지는 공명, 내면에서 알 수 있는 능력입니다.

더 높은 주파수에 접속하는 방법을 기르는 것이 외부 방향을 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큰 힘을 가진 개인들은 자신을 강력한 근원의 힘과 온전히 정렬시킨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그 무한한 힘의 근원을 자신 개인이 아닌,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돌렸습니다.


여러분이 분별력을 높이고 의식 상승 과정을 일으키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높은 에너지 패턴과 낮은 에너지 패턴의 차이, 힘(power)과 위력(force) 차이를 고려해 보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사람 내면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참된 힘은 우리의 의식, 근원에서 비롯되고, 반면에 위력은 물질 세계에 의존합니다.
때문에 참된 힘은 위력이 극한의 노력으로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수월하게 성취합니다.
40킬로그램의 유색인에 불과했던 간디가 당시 세계 최대 세력이던 대영제국을 물리쳤던 것은 간디가 위력의 폭력성 대신 인간의 내재적 존엄성 및 자유라는 참된 힘과 정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힘은 생명과 인간 가치를 지지하고, 위력은 개인이나 조직의 이득을 위해 생명을 착취하는 것과 결합니다.
참된 힘은 우리의 높은 본성에 호소하고 위력은 사람의 낮은 본성에 호소합니다.
참된 힘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같으나 목적을 이루려면 성숙, 인내가 요구됩니다. 위력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주장으로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제공하는데, 실상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유를 팔아넘깁니다.
이기적인 목표에는 참된 힘이 보탬이 되지 않으므로,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참된 힘의 발현이 저지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 원칙을 어기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막대한 힘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미 종교, 상업, 정치 등 많은 분야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위력은 흔히 설득으로 지지를 획득하고 저변의 동기부여를 감추기 위해 수사, 선전, 그럴듯한 주장에 의존하고 항상 그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놓고 끝없이 논쟁이 벌어지지만 참된 힘의 진실성과 그 바탕에 있는 원칙들은 그런 방어나 옹호를 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힘이 우리에게 믿음과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것은 그들의 온전성의 힘, 그리고 불변의 원칙과의 정렬이 갖는 힘 때문입니다. 힘과 위력이 맞닥뜨릴 때, 참된 힘은 항상 결국 성공합니다.

참된 힘은 창조성의 영역이고 천재는 의식의 한 특징이기에 모든 인간 속에 거하는 잠재력입니다.
참된 힘은 바닥나지 않는 공급원이고, 그것은 높은 에너지와 정렬로 인해 삶에 다른 전망을 갖습니다. 생명을 지지하는 것은 생명에 의해 지지받습니다.
위력이 유혹적인 것은 그것이 어떤 매혹을 발산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가짜 애국심, 위신, 우세함 등을 가장하며 오만합니다. 반면에 참된 힘은 별로 매혹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고 겸손함의 특징을 지닙니다.
참된 힘은 상생하는 해법을 가져오고, 가상적 원인을 공격하는 대신 해결책을 지지합니다. 위력은 이기고 지는 상황을 빚어내 대립물의 투쟁이 발생합니다.
참된 힘은 인간 욕구의 해결을 지지하고, 해결에 비용이 들지 않으며, 평온을 가져다 줍니다.
인위적으로 창조된 문제를 공격하는 것은 항상 비용이 많이 들고, 그에 더해 사회를 더 복잡하게 몰아갑니다.
위력의 접근법은 두려움인데, 타인을 통제할 필요는 힘의 결핍에서 비롯되고, 총과 야경봉은 약함의 증거물입니다. 
성공적 해법의 바탕에 있는 강력한 원칙은, 해결이 부정적인 것을 공격하는 데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육성하는 데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참된 힘은 인간 필요의 충족에 만족감을 가져오고, 위력은 사회 문제를 근절하느라 욕구불만과 폭력, 범죄, 감정적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참된 성공이 상대적으로 그렇게 많은 노력이 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전선을 타고 흐르는 전류에 의해 창조된 자기장을 떠올려 보세요. 그것은 자신의 삶을 높은 힘의 에너지 패턴과 정렬 시킨 결과입니다.


다섯 번째, 직관이라는 내면의 음성


분별력을 끌어올리는 드라마의 여정에는 여러분이 인식하든 못했든간에 세 배우가 등장합니다.

순수인식(의식적인 자아), 에고, 내면의 스승입니다.


ㅡ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ㅡ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7)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내면의 스승을 가리킵니다.

직관이라는 내면의 음성을 통해서 여러분을 가르치며,  인생 코치나 개인적인 트레이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개인적인 스승입니다.

이것은 외면의 마음, 의식적인 자각, 그리고 상위 존재와 영적인 영역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따라서 '이원성 마음에서 비롯되는 많은 상대적인 진리'와 '내면의 스승으로부터 주어지는 더 높은 진리'를 혼동하지 않고 분별하도록 도울 수 있는 길잡이입니다.


신앙이 있고 없고를 떠나, 여러분은 이미 이 내면의 스승으로부터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홈페이지에 들어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도 삶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여러분의 결정을 돕는 내면의 인식이 있었을 겁니다.


순수인식과 에고에 대한 이해는 다음 링크된 게시글을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고란 무엇인가요?


이미시출처:123RF



여섯 번째, 여러분이 관심을 주는 곳으로 여러분의 에너지가 간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자 여기서 앤코이 노블인들에게 드리고픈 중요한 말씀은

우리가 직관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관심을 주는 곳으로 여러분의 에너지가 간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는 여러분 각자에게 자신의 가슴에 가깝게 느껴지는 특정 문제, 특정 주제를 선택하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이슈를 알아야 하거나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보다 중요한 것을 선택하세요.


스스로에게 더 유익한 것은 여러분을 속이는 것을 허용하는 의식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건설적인 지식과 지혜이고, 이것이 성장을 증진시킬 겁니다.



일곱번 째, 중도의 관점


참나의 관점은, 세상에서 어떤 것도 실제로 흑백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궁극적인 이해, 모든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이론, 인간에게 알려진 삶의 모든 측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이 있다고 믿거나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모든 관점에는 상대적인 다른 관점을 발견해내는 것이 가능하고, 항상 반대되는 것이 있습니다.

더구나 절대 틀릴 수 없다고 말하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이성적인 마음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많이 놓치고 있습니다. 


앤코이 노블인들에게 실제적인 이슈는 자신과 사람들의 의식을 어떻게 높여 성장하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을 넘어섬을 의미합니다.


비 이원적인 관점, 중립적인 태도로 계속 듣고 읽다 보면 상대의 말이 실상 전혀 논리적이지 않으며 일관성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옵니다.

이원적인 논리를 극단으로 가지고 가면, 그 결점이 명백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에고에 의해 속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에고의 의해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미지출처:구글이미지


여덟번 째, 이데올로기의 요소 알기


이데올로기는 어떤 집단이나 사회에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일련의 신념이나 관념 또는 태도 등을 뜻합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마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있었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개인이나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며 변화의 연쇄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데올로기가 타인에게 강요되었던 경우, 대부분은 그것이 사람들을 기만하고 조종하고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가르침으로서 활용되어 왔다는 것을, 그대는 혹시 알고 있나요?


이데올로기의 특성 중 하나가 무엇인가요?

여러분이 이것을 조용히 직관 안에서 조율해 볼 때, 긴장감을 증가시키고, 사람들의 집단 사이의 갈등을 증가시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종 전쟁으로 이어지며, 이것은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다섯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삶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특정한 것들을 설명하려는 하나의 이론이나 체제

2)일어날 필요가 있는 사회 변화나 정치 변화의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

3)이 프로그램의 이행이 하나의 투쟁으로 묘사된다는 것

4)명분에 대한 헌신을 하는 사람들이 명분에 동참하고 명분을 지지하기 위한 요청이 있다는 것

5)일반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지만 실제로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있는 특정 그룹이 있다는 묘사가 있음. 이것은 많은 경우 지식인들 중에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다른 유형의 엘리트들일 수 있음.


이데올로기는 선형적이고 이성적이며 분석적인 접근법에 여러분을 묶어 둡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항상 보고 들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죠.


한 가지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 자체가 이원성 안에서 고안되었고, 이원적인 관점 안에서는 어떤 당연하게 여기는 특정한 토대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수 없고, 틀릴 수가 없다는 측면에 서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됩니다.

나는 특정 당만을 지지합니다. 나는 ㅇㅇ을 혐오합니다. 나는 ㅇㅇㅇ입니다. 

말 그대로, 다른 형태의 정체성,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형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고, 이제 지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이 믿는 이데올로기를 검증하지 않는 정보는 걸러내고, 검증하는 정보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자신들이 올바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그것이 진리라고 결정하게 되죠.

이중에는 자신들이 일부 선택된 사람들에 속해 있다는 생각으로, 헌신과 명분을 통해 무슨 일이든-필요하다면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죽이는- 벌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민낯인 것입니다.



이미지출처:네이버 이미지



아홉 번째, 결정하는 책임(실수에 대한 두려움 넘어서기)

우리는 다른 게시글에서 대중으로서 개인이 가진, 결정하기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책임지기를 두려워하여, 누군가 대신 결정해 주길 바라는 심리적 측면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인생이 배움의 과정이라면, 왜 이토록 고통스러워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여섯 번째 이해: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한가요? 파트 부분)

그것은 일종의 실수를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위에서 우리는 딱 하나의 실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일, 마찬가지로 결정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마음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심리적 문제로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올바른 직관, 분별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 가끔은 기꺼이 틀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틀릴 의향이 없다면 옳은 방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실수할 때 자신을 비난하지 말고, 갖고 있는 어떤 능력이라도 기꺼이 실험하고 그 체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내가 잘할 수 없다면 시도하지 않겠다? 음... 글쎄요, 시도하지 않으면 잘할 수 없습니다. ^^

아무도 한순간에 분별력을 키워본 적은 없습니다.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의사이자 교육자. 전 세계 어린이들의 어머니라 불리며, 그녀의 과학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담긴 몬테소리 교육방식은 오늘날 전 세계 공립 및 사립학교에서 활용되고 있다.) 는 그녀의 저서를 통해 '정신적 자유에 따르는 위대한 깨달음 중 하나가 바로 우리 모두가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또 실수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된 것이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해야 할 때, 그 사람은 열등감과 절망을 느끼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품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더 잘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자신이 더 나은 방향으로 들어섰는지 여부를 스스로 알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일을 더 잘하게끔 연습을 거듭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실수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자유를 누림과 동시에 실수를 저지를 때 스스로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내면의 확실한 수단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실수 관리는 우리가 삶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지 여부를 말해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삶과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M. 몬테소리가 말했듯, 앤코이 역시 '실수 관리'가 교수법과 교재에, 그리고 학교나 가정의 실제 생활에도 반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나 엄마가 완벽한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인간적 실수가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다가오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일 것입니다.

실수가 심각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것이 되고 인간적인 것, 자연에 고유한 한 가지 사실이 됩니다.

우리 모두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들의 가슴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다정함, 나이를 초월한 형제애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실수를 접하면서 동시에 실수를 관리하는 능력을 얻은 아이는 그 연습을 통해 스스로를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에게 확신을 품는다는 것이 완벽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알고, 따라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경험을 의미합니다.


그런 아이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도 없지. 하지만 나는 나의 힘을 알고, 내가 실수를 저질러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나는 나의 길을 믿어.'


이미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늦은 것은 아닙니다.

문명의 모든 성취는 파괴를 낳을 수 있지만, 위와 같은 종류의 확신과 사랑이 거기에 가미된다면, 거기에는 엄청난 가치의 차이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식적인 의지를 사용해 기꺼이 노력하고 배울 것을 결정하고 실수하더라도 거기서 배우고 떠나세요.

중요한 것은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인식하고 스스로 그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는 더 나은 분별을 요청하는 기도를 날마다 습관으로 삼고, 이어서 다가오는 경험을 가지고 분별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마치 옳은 것이 한 가지뿐이고 다른 선택을 했었어야 한다고 보여지고 후회되는 많은 상황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동안 실수를 할까봐 많이 두려워 해왔습니다.

어떤 선택 이후에 불쾌한 일이 생기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탓하기도 하구요. 더불어 상대의 실수에도 관대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에서 뭔가를 배웠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모든 선택사항들이 완벽히 괜찮은 상황들이 분명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 실험을 통해 배우는 것(성장)에 초점 두기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후회, 비난보다는 그대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직시하고, 결과로부터 배우는 것에 초점을 두세요.

원래의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것을 배우도록 직면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세요.

이것은 누군가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고,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깊은 측면에서, 그저 교훈을 얻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진정한 자신과 직접적인 접촉을 얻기 전까지 일정 기간의 불확실성을 거치는 것이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단계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을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노와 비난의 의식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자신과 상대를 감정적으로 묶어 둠으로써, 자신의 성장을 멈추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둘 다에서도 살펴봐야 할 부분입니다.


일단 그렇게 전환을 하고 나면, 실제 결정하는 책임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지경이 넓어지며, 자신과 타인의 상황들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성장입니다. 성장은 어떤 면에서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한 결과를 살펴봄으로써 얻게 되는 통찰과 이해입니다.

상황과 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불평불만은 어떤 면에서 상대에 대한 이해 부족이기도 하며, 함께 그것에 대해 터놓고 논의할 수 있을 때, 전혀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가 유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전환은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여유 있는 시선과 협력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여러분은 단지 경험에서 배우고, 그것을 이용하여 여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심리적 전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자신과 전체의 성장을 돕는지, 혹은 방해하는지에 우선순위를 두고 한번 살펴보세요.

이전처럼 어떤 것을 부정하거나, 저항하고 정당화하거나 비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유혹을 견뎌내고, 그간 보지 못했던, 우리의 성장을 방해해 왔던 어떠한 것을 알아챘다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진전입니다.

이제 그것을 통해 어떻게 함께 더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이전의 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교훈은 무엇일지 찾아 보세요.

교훈을 배우고 나면, 과거를 놓아버리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만약 집단에 이러한 전환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상상치도 못했던 커다란 변화를 보게 될 겁니다.


개인 안에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을 힘들게 하고 옭아매는 반응패턴(심리)을 연구하며, 그것에 동일시 되지 않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안다면, 외적인 가르침만으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절대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점으로 이동하는 커다란 성장과 전환도 가능해집니다.

이런 전환과 함께 외부 가르침마저도 이제 그대의 직관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통합에 도움이 되는 통찰력을 얻고,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고, 심지어 특정 가르침에서 말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대의 이해가 증가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대들의 여정을 깊이 응원합니다. ^^




출처: Youtube, 책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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