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코이가말합니다

명상

앤코이 교육재단 2021-04-28 18:30 조회수 아이콘 13

앤코이가 앞서 '명상'에 대한 언급을 다루다 보니,

이런 질문들이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명상을 시도해봐도 잘 안되던데, 명상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명상의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어떤 형식을 따른다는 건, 그것에 자기의 마음을 맞추어버리는 결과가 되고, 이것이 자유에 반하는 것이라는 걸 내면에서 전혀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명상을 시도해왔다면, 자신이 그것을 피하려 한다는 것을 혹 알아챘을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자기의 마음을 한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어떤 하나의 이미지나 관념에만 마음을 집중하려고 한 구석에 앉아 명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결코 그것의 성공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경험해 보았다면 이미 알듯이, 매번 다른 생각이 마음 속에서 솟아나와 모순을 자아내곤 하는 식이 아니었던가요...

그대는 왜 명상을 하려 하나요?

'고요'와 평화로 인한 '자유'를 얻기 위함이 아니던가요?

모순 속에 고요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모순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에만 모순이 그치고, 모순이 그쳤을 때에만... 비로소 고요가 나타납니다.

'고요함'이란 실은 모순 속에 놓이지 않은 '마음 본래의 상태'입니다.


굳이 명상만을 놓고 말하지 않는다 해도, 이밖에도 우리는 흔히 그 낭비 많은 모순과의 싸움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 왔지만, 결국 아무런 보람이 없었습니다.

내면을 세밀하고 면밀히 들여다 본다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지요.

온갖 이미지를 만들어냈었지만 그것이 허망이고, 그런 것은 마음 저 너머에 있는 오직 하나인 창조력과 '무'의 자재, 자유로 이끌어 주는 참됨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이나 사상을 진리로 알고, 그 생각이나 사상으로 실재를 만들어내려 애를 씁니다. 

그것이 될 리가 없는 것을 일찌기 깨닫기는 참 어렵습니다.

많은 경험과 점진적인 과정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대 마음이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워졌을 때, 비로소 그대가 간절히 바라던 '그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지, 결코 마음 속으로(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실존하고, 스스로가 '생명' 그것 자체임을 깨닫게 될 때 드러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진실...

그대가 온갖 신앙이나 주의, 관념, 사상에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그대의 창조력은 무한히 커질 겁니다.


명상은 자유로 이끌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얽매이지 않는 마음만이 '실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스스로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게 되면, 보다 큰 것을 알게 된다.


 특정 시스템의 훈련을 받아버린다면, 실상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전보다 더 묶여버리게 된다.

참된 명상은 마음 저쪽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

특정 시스템은 얽어매고 파괴하는 한낱 자기최면에 불과해.



그대의 마음에서 일체의 신앙, 형식, 계율이 모두 떨어져 나가야 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자기를 지배하고 제약하는 것들이 제거되야만 비로소 사람은 남의 신앙이나 관념, 사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창조력으로 창조할 수 있어.


신앙의 정체, 관념, 사상의 정체가 알아지면, 그 '너머'에 있는 것이 터득되어,

'참'으로 있는 것,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대는 그대의 자아, 곧 그대의 모든 관념들을 냉정하게 살펴보고

남들과의 관계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하는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마치 남을 관찰하듯 세밀히 관찰함으로써, 

자아, 곧 자기 생각의 존재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자기 한정'이 드러납니다.


그 때에 자기 한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을 탓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은 채로

그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두려워하거나, 탓하거나, 회피하거나, 저항함으로써 

스스로가 자신을 얼마나 한정해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두려워하고, 탓하고, 회피하고, 저항하는 것이 바로 '자아', '에고'가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도 망상도 없이, 그 과정 속에 참된 명상이 있는 것


해탈이나 진리는 그것을 탐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 편견, 자기 한정, 망상 따위의, 에고의 덧없는 짜임새 전체를 분명히 앎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며,

그것을 꿰뚫어 보았을 때, 그것들은 녹아 없어져, 남는 것은 실재, 곧 '참나'라는 것을.


명상이라는 것은 다른 자아, 곧 남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이어져 있고, 그대로 '전체'이며, 완전한, 

그리고 어떠한 한정도, 영향도 받지 않는 '참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런 체험만이 참된 명상이다.


자기한정에서 비롯된 상념이, 에고에서부터 시작되, 에고에서 끝난다는 것,

그것이 얽매인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침묵이 찾아든다.

스스로 애써서 만들어낸 침묵이나, 자기 최면의 결과인 침묵이 아니고 

또, 시간에 속해 있는 침묵도 아니며, 참으로 영원한 것이 계시되는 커다란 침묵이야말로

바로 영원, 그것이다. 


이 큰 침묵 속에 창조의 근원이 있다.

이것이 큰 스승들이 알고 있는 침묵.

그것은 실재함이요, 시간이 없고, 기억이나 경험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 모순이 없는 자리.


지금까지 얼마나 스스로 한정해 왔는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명상하라고 스스로 마음에 강요해온 것은

시간과 에너지 낭비였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묶어 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는 것은 명상도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런 명상은 그저 자기 한정에 따라, 무엇인가를 비춰 내보고자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야.

그런 것은 실재가 아니야.


실재의 한없이 큰 힘. '나'라는 것이 없어지면 신은 자신을 남김없이 나타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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